환언베뢰아특강(42)
일시 : 2018년 4월 6일
강의 : 김기동 감독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1~5)
보통 교회에서 ‘삼위일체’라는 말을 자주한다. 삼위일체는 기독교의 교리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최고의 교리이다. 기독교인인가 아닌가가 바로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믿느냐 안 믿느냐에 따라 구분된다. 그런데 정작 삼위일체라는 말의 의미를 설명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세상에는 종교가 많다. 종교 중에도 유신론을 주장하는 종교가 있고 무신론을 주장하는 종교가 있다. 예를 들어, 불교는 무신론이다. 유교는 종교의 특성을 갖추긴 했지만 종교가 아니고 학문이다. 이슬람교는 종교이면서 유신론을 주장한다.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는데, 그런 복잡한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영혼과 믿음을 어떻게 지키고 있을까? 이는 ‘삼위일체’ 신앙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유일신 신앙이다.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십계명의 첫 계명이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라.”이다. 세상에는 신이 많다. 인도에 가면 신의 종류가 7억이라고 한다. 두 사람이 하나 꼴로 신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일본에는 신이 300만이라고 한다. 그 많은 신들 가운데 하나님 같은 신이 또 있는 게 아니다. 하나님은 유일하시다. 어떤 면에서 그런가? 오직 하나님만이 삼위일체시다.
삼위일체는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는 것이다. 내가 신학교 다닐 때 총신대 교수가 와서 삼위일체에 대해 강의한 적이 있다. 그런데 복잡해서 도저히 무슨 얘기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다른 방향으로 질문을 했는데, 교수는 삼위일체는 450년 동안 논란이 되어 온 교리이기 때문에 확실하게 해명하기 어려우니 알아서 열심히 연구해서 발표하라고 했다. 나는 마귀론 등 몇 가지 강의를 할 때 삼위일체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건 내가 어디서 배운 게 아니라 성경에서 본 것이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성경에 있는 삼위일체를 잘 모른다. 그저 예수께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라 하셨기 때문에 ‘성부, 성자, 성령’ 삼위는 말하지만 왜 일체인지는 말하지 못한다. 삼위일체는 구원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하다. 생명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잘 알아야 한다.
요한복음 1장 1절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고 했다. 그 말씀이 누구와 함께 계셨나?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고 했다. 여기에 벌써 말씀이 왜 하나님이신지 답이 다 나와있다.
요한복음 1장 14절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라고 했다. 참으로 은혜를, 진리를 사모하는 사람은 성경을 끝없이 상고할 것이다. 왜? 그 안에 진리가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 보화가 묻힌 밭을 발견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밭의 주인은 자기 밭에 보화가 있는데도 몰랐다. 그래서 가난했다. 하지만 이 사람은 비싼 돈을 주고 그 밭을 샀다. 왜? 그 밭에 있는 보화를 캐기 위해서. 우리가 어디서 은혜 받았는가? 말씀에서 은혜 받았다. 말씀이 곧 하나님이다. 그 말씀에 독생자의 영광이 있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했다. 진리를 어디서 아느냐? 말씀에서 안다. 말씀을 아는 것이 진리를 아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을 상고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 있으면 다 진리인가? 우리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를 다 말씀이라고 한다. 그런데 밤송이에는 껍데기가 있고 껍데기에는 가시가 둘러져 있다. 밤 껍데기와 가시가 다 밤송이의 일부분이다. 밤을 먹으려면 그걸 다 가지고 와서 껍데기를 떼고, 껍질을 벗겨내야 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있는데, 밤송이 같아서 먹지 말아야 할 가시 같은 위험한 말들도 있다. 밤을 먹을 때 가시 껍질을 벗기고 그 안의 딱딱한 껍질을 벗기고 또 떫은 속껍질까지 벗겨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서 다 ‘믿습니다!’ 하고 먹다가는 죽는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알아서는 안 되는 것에 대해 경고하셨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마라.’ 하는 것이 그것이다. 선악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권한이다. 사람이 침범하면 안 되는 권한이다. 알면 다 죽는 것이다.
이를 가장 쉽게 말하면, 성경은 신약과 구약, 즉 첫언약과 새언약으로 나누어져 있다. 구약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고 계시가 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있다. 구약에 있는 말씀은 육체의 예법이기 때문에 그것으로 우리 육체가 복을 받을 수 있다. 율법의 덕은 육체가 본다. 오늘날에도 율법대로 살면 육체가 복을 받는다. 율법대로 십일조 해 보라. 율법대로 월삭을 내보라. 복을 받는다. ‘월삭’이란 말은 한자어로 달 ‘월(月)’자에 초하루 ‘삭(朔)’자를 쓰는데, 하나님께 바치려고 마음 먹은 예물을 매월 초에 드리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의 월정헌금과 같은 것이다. 지금도 이를 잘 지키면 복을 받는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영혼을 구원할 수 없다. 율법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지 못한다. 우리를 죄인 만들어 저주하고 죽게 할 뿐이다. 왜? 율법은 사망권세다. 그래서 구약성경만 편중되게 읽으면 오히려 저주를 받게 될 수도 있다.
본래 인간은 선악을 알면 안 된다. 선악은 하나님만 아셔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지 마라.” 명하셨다. 그런데 마귀가 하와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하고 물었다. 그러자 하와는 “먹으면 죽을 수도 있다고 하셨다.”고 말했다. 이에 마귀는 “안 죽는다!” 라고 했다. 하나님은 분명히 ‘선악을 알면 너희는 죽는다.’ 하고 말씀하셨는데 마귀는 ‘선악을 알아도 너희는 죽지 않는다.’라고 한 것이다. 마귀는 처음부터 거짓말쟁이요 살인자다(요 8:44). 마귀는 사람을 죽게 하려고 작정한 자다.
마귀가 하와를 유혹한 것이 얼마나 큰 문제일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7)
‘정녕 죽는다’란 절대로 살아날 수 없다는 의미다. 원죄가 무엇인가? 정녕 죽을 죄를 지은 게 원죄다. 당시 아담 안에 인류가 있었다. 하와도 아담 안에 있었다. 그런 자가 죽을 죄를 지은 게 원죄다.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상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1~5)
그런데 뱀은 ‘너가 선악을 알면 하나님같이 될까 봐 그걸 먹지 말라 한 것이다. 죽을까 봐 먹지 말라 하신 게 아니다.’라고 했다. 선악을 알아도 죽지 않는다는 거다. 율법이 뭔가? 선악을 알게 하는 법니다. 양심이 뭔가? 선악을 알게 하는 거다. 하나님은 분명히 선악을 알면 죽는다고 말씀하셨다. 지금도 깨닫지 못하면 진짜 끝이다. 선악을 분별하는 일이 영적으로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겠는가? 그렇게 해도 육신은 아무 변화가 없다. 벼락이 떨어지지 않으니까. 떳떳할지 모른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아주 끝이다.
선악을 분별하는 게 뭔가? 판사가 재판소에서 선악을 판결한다. ‘이건 무죄, 이건 유죄.’ 이렇게 선악을 분별한다. 그런데 누가 심판자인가? 하나님이 유일하신 심판자시다. 다시 말해 하나님만이 선악을 분별하시는 자시다. 절대로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심판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오늘날 모두가 누가 어쩌고저쩌고 하며 선악을 분별하지 않는가?
그럼 우리는 뭘 알아야 하나?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와 진리가 있다. 그것을 알라는 것이다. 하와도 뱀에게 말할 때 ‘하나님의 말씀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다. 먹으면 죽는다 하셨다.’ 했다. 그게 바로 알아야 할 말씀이다. 그 말씀이 은혜와 진리다. 우리는 은혜와 진리를 알아야 한다. 무엇이 진리인가? 예수께서는 “내가 곧 진리다.” 하셨다.
은혜는 어떻게 임하는가? 성령으로 임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는 성령으로 받는다. 성령 없이는 은혜 받을 수 없다. 우리가 알아야 하나님의 말씀은 은혜와 진리다. 그것 외에 다른 건 없다. 구약성경의 말씀이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하신 것은 구약성경이 요구하는 바를 다 이루었다는 의미다.
모든 사람이 율법은 몰라도 양심은 다 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거리끼는 일이 생기면 ‘아이고, 내가 이거 잘못했다.’ 한다. 그런데 그게 누구를 죽이거나 간음하거나 도둑질한 게 아니기 때문에 큰 죄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금방 잊어버린다. 과연 그럴까? 천만의 말씀! 성경은 "네 마음으로 미워한 자도 살인자요 마음으로 음욕을 품은 자도 간음한 자요 마음으로 탐심을 품은 자도 도적질 한 자니라"라고 했다. 똑같이 지옥 갈 죄다. 그런데도 사람은 평생 그런 식으로 선악을 분별하며 산다. 어린아이도 마찬가지다. 아이가 잘못된 행동을 할 때 엄마가 “너 이리 와! 잘했어, 잘못했어?” 하면 아이는 “잘못했어요.” 한다. 아이도 잘한 것과 잘못한 것을 구분한다.
본래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을 때 은혜와 진리만 알도록 명령하셨다. 그런데 인간이 뱀의 꾀임에 빠져 선악을 알아버린 것이다. 그 다음부터는 살아날 수가 없다. 반드시 죽어야 한다. 그런데 예수가 인간 대신 죽어주심으로써 구약성경이 끝이 났다. 첫 언약이 마감된 것이다. 다 완성됐다. 인간에게 지옥 형벌이 미치기 전에 예수는 홀로 총알받이가 되어 죽음으로 인간의 죄의 문제를 다 해결하셨다. 이제 인간에게 쏟아지는 저주와 형벌이 끝났다. 그리고서 새 언약이 시작되는데, 계명도 새 계명으로 주셨다. 율법에서 계명은 십계명이다. 새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 하신 말씀이다. 사랑하라는 말씀에는 십계명보다 더 깊고 장황한 계명들을 포함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하늘에 오르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성령 받을 것을 부탁하셨다. 그는 첫 언약을 마치고 하늘에 오르셨다. 그리고 하늘에서 보내신 성령으로 믿는 자들 안에서 새 언약을 시행하신다. 그래서 성령을 거역하거나 훼방하는 사람은 망한다. 율법을 범하고 예수를 죽게 하는 죄를 범해도 구원받을 수 있었다. 그런 죄는 예수께서 이미 해결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은혜를 받고도 성령을 거역하는 죄를 범하면 이는 어찌할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은 이런 이야기를 듣기 싫어한다. 벌써 죽은 영, 저주 받은 영은 진리를 싫어한다. 세상에 빛이 왔는데 세상이 그 빛을 싫어한다고 했다(요 3:19~20). 당신은 살려고 하는 사람인가 죽으려고 하는 사람인가? 각각이 자기가 어떤 심령인지 알 수 있다.
"저희는 세상에 속한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요일 4:5~6)
우리는 자기가 진리의 영에 속했는지 미혹의 영에 속했는지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성경에도 ‘영들을 다 믿지 말라, 세상에 많은 거짓 영들이 있다.’ 했다(요일 4:1). 적그리스도의 영이 있다는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사탄이란 말이 아니다. 진리와 은혜에 반대되는 영들이다. 간단히 말하면 예수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영이다. 그가 육체로 오셔서 뭘 하셨는가? 피 흘려 첫 언약을 완성하셨다. 그가 육체로 오시지 않았다면 피를 흘릴 수가 없고, 그러면 우리를 구원할 수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심으로써 죽게 된 영들을 지배하는 율법, 양심을 끊어버렸다. 이제 우리는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먹기 이전의 사람과 같이 은혜와 진리만 알면 된다. 어떤 과일이 있을 때 눈으로 그 모양만 안다. 그 맛은 먹어봐야 안다. 또 그 과일이 어떤 사람이 먹으면 좋은지 나쁜지, 혹은 먹어도 되는 것인지 아닌지는 과학적으로 알아봐야 한다. 열매 하나를 가지고도 눈으로 보는 것과, 혀로 먹는 것과, 과학적으로 분별하는 방법으로 있듯, 우리가 은혜와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살펴봐야 한다.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셨다. 사람이 40일 동안 먹지 않으면 완전히 말라버린다. 40일 동안 예수께서는 물도 마시지 않고 육신의 요구를 완전히 거절해버렸다. 그런데 마귀가 그런 예수께 와서 시험을 했다. 첫 번째 마귀의 시험은 “이 돌들로 떡을 만들어 먹어라.” 하는 것이었다.
성경에는 여러 가지 비유가 많지만, 원칙이 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광야로 이끌어 나간 다음에 제일 처음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주신 양식이 뭔가? 시내산에서 모세가 가지고 내려온 돌비석, 바로 율법이다.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것은 율법대로 살라는 것이다. 육신은 율법대로 살면 복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영혼은 아니다. 예수는 영혼을 구원하러 오신 분이지 육체를 구원하러 오시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마귀에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라.”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이 말씀인데 그 말씀이 드디어 오셨다. 말씀으로 산다는 건 예수로만 산다는 거다. 돌비석에 새겨진 그것은 사람의 육체만 살릴 뿐이다. 그런데 마귀는 율법 아래서 육체로 사는 사람의 방법으로 예수를 유혹했다. 그리스도가 왔는데도 그에게 계속해서 ‘너 율법대로 살아라!’ 하는 거다. 율법대로 살면 죽는다. 십계명이 새겨진 돌비석은 성막의 법궤 안에 있는데, 만나를 담은 항아리와 아론의 지팡이도 그 안에 있다. 육신을 이끄는 법이 그대로 법궤 안에 있는 것이다.
사람을 살게 하는 말씀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이 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 사람은 바로 그런 말씀으로 산다. 구약성경이 아니다. 복음을 말한다.
마귀의 첫 번째 시험은 ‘율법을 지키라.’ 하는 것이고, 두 번째 시험은 뭔가? 예수를 성전 꼭대기에 데리고 가서 “뛰어내려라. 그러면 천사가 네 발을 붙들어 상치 않게 하리라.” 했다. 성전 높은 데서 뛰어내려도 천사가 와서 너를 구해줄 것이란 말이다. 이는 천사가 구주가 된다는 말이다. 구약에서는 천사가 사람들을 애굽에서부터 예루살렘까지 이끌어 왔다. 성령이 이끌지 않았다. 예수가 올 때가지 천사가 사람들을 이끌었다. 마귀의 두 번째 시험은 ‘천사가 네 구주가 되리라’, 말하자면 ‘여호와가 네 구주가 될 것이라’ 하는 의미다.
우리는 천사가 아니라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 율법은 천사들의 손을 통해 우리에게 베푸신 것인데,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까지 있게 한 것이라고 했다(히 1:13~14). 율법은 육체의 예법이다. 이제부터 우리는 성령으로 인도 받아야 한다. 왜 우리가 침례 받는가? 침례 받은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 성령을 받아서 어떻게 되는가?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성령이 인도하신다고 했다(요 3:3). 구원 받은 자, 곧 하늘에 속한 자는 성령이 인도하신다. 우리의 구주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이시다. 성령이 우리 발을 붙들어 주셔야 한다. 천사가 붙들어주는 게 아니다.
천사는 우리 구주가 될 수 없다. 그래서 히브리서 1장 5~7절은 "천사 중 누구에게 네가 내 아들이 되리라 한 적이 있느뇨 또 누가 언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리라고 한 적이 있느뇨 천사는 다만 부리는 영으로써 주님 오실 때에 바로 그를 위해서 일하는 영이다 바람으로 불꽃으로 일하는 자다"라고 했다. 천사는 오직 구원 받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도우라고 보내신 영이다(히 1:14). 종이라는 거다. 구약시대에는 천사가 이끌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우리의 구주는 예수다. 그리고 그가 보내신 성령이 우리를 인도하신다.
이처럼 마귀는 예수를 계속 구약과 율법에 묶어두려고 했다. 그래서 돌로 떡 만들어 먹어라, 천사가 너를 붙들어 주게 하겠다고 했다. 예수가 만일 마귀가 시키는 대로 했다면 살아있지 못했을 것이고, 그러면 사람을 구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세 번째, 마귀는 예수에게 “나에게 경배하면 천하 영광을 주리라” 했다. 마귀가 첫 번, ‘너 율법대로 살아라.’ 할 때 주님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라 하셨느니라.’ 했고, 두 번째 ‘천사가 네 구주가 되리라. 그러니 믿고 뛰어 내려라.’ 했을 때는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했다. 세 번째, ‘나에게 경배하라. 그러면 천하 영광을 주리라.’ 했다. 그는 이 세상 임금이다. 바알세불이다. 거기다 절하라는 것이다. 그때 주님은 “사탄아, 물러가라. 하나님께만 경배하라 하셨느니라.” 했다.
율법에는 마귀의 역사가 따른다. 율법을 기회로 마귀는 사망 권세를 가지고 와서 죽인다(롬 5~7, 10).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사망 권세에게 절을 한다. 사람들이 집을 짓거나 사업을 시작할 때에 먼저 귀신에게 절을 하곤 한다. 사망이 두려워서 종노릇을 하는 것이다.
이처럼 마귀의 시험은 전부 율법과 관련이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야 한다.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은 피 흘리기 위해서이다(히 2:9). 피 흘림이 없이는 우리가 사함 받을 수 없다. 예수께서 피 흘리심으로 우리에게서는 선악을 아는 법이 지워졌다. 그래서 아무도 그리스도인을 정죄할 수 없다. 우리를 의롭다 하신 이가 그리스도인데 누가 감히 우리를 정죄하겠는가? 아무도 선악을 아는 법에 의해서 그리스도인을 정죄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선악을 아는 법에 갇힐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은혜와 진리의 말씀뿐이다.
요한복음 1장 1절은 “태초에 하나님이 말씀과 함께 계신다”고 했다. 여기서 ‘함께’라는 말이 중요하다. 사도행전 1장 1~4절에 보면 예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여 하늘에 올라가실 때까지 오직 성령으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고 일하셨다고 한다. 그가 요단강에서 성령을 받기 전에는 나사렛 사람이었다. 그냥 촌 사람이다. 그러나 그에게 성령이 임하신 다음부터 그는 성령으로 행하시고, 성령으로 제자를 삼으시고, 성령으로 가르치시고, 성령으로 말씀하시고, 성령으로 죽으시고, 성령으로 부활하사 하늘에 오르셨다고 했다. 성령이 모든 걸 함께 하시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 제자들에게도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을 기다리라.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내 증인이 되리라.’라고 말씀하셨다(행 2:8). 성경은 말세에 내 남종과 내 여종들에게 내 영을 부어주리니 그들이 예언도 하고 환상도 보고 꿈도 꾼다고 했다(행 2:17). 말세에 우리에게서는 주님이 보내신 성령으로 큰 역사가 일어나라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감동돼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떻게 삼위일체가 되시느냐? 태초 이전부터 하나님과 말씀이 함께 계셨다. 하나님과 말씀은 분리할 수가 없다. 고린도전서 12장 4~6절은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가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가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라”라고 했다.
하나님 아버지는 모든 걸 역사하시는 분이다. 그는 모든 걸 계획하시고 주관하신다. 본래 아들이신 예수는 아버지와 동등하시다. 그런데 그가 아버지 앞에서 자기를 겸손히 낮추어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셔서 ‘아버지는 나보다 크시다.’ 하신 것이다. 아들이 아버지를 높이셨지만, 그래도 아버지와 아들은 분리될 수 없다.
모든 사람 가운데 모든 일을 역사하시는 분은 하나님 아버지시다. 그가 아들을 후사로 세우시고, 아들을 위해 만물을 창조하시고, 아들로 하여금 구원하는 일을 하게 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게 하셨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을 위해 역사하신 것이다.
아들이 다시 오시는 그날을 아시는 이도 오직 한 분, 즉 하나님 아버지시다. 그날은 천사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아무도 모른다. 그 권한은 오직 아버지께 있다. 이처럼 모든 계획을 아버지가 하신다. 예수를 통해, 성령을 통해 하시는 모든 역사의 설계를 아버지가 하신다.
그런데 아무리 뜻이 있어도 실행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는 뜻이 있어도 피 흘려주는 자가 없으면 우리를 구원할 수가 없다. 누구에게 집 한 채 사주고 싶어도 돈이 없으면 못 사준다. 마찬가지로 형제에게 ‘너 배고프겠다. 가서 밥 먹어라.’ 하고 말만 하면 무슨 소용인가? 밥 먹을 줄 몰라서 배고픈 게 아니다. 돈이 없어서 배고픈 거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인류를 사랑하셔서 그들을 구원하려 하시는데, 그러려면 누군가 피를 흘려야 한다. ‘피 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다’ 했다. 하나님은 그 직분을 누구에게 맡기셨는가? 아들에게 맡기셨다.
아들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아버지 앞에 죽기까지 복종함으로 자기를 낮추기 위해, 겸억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기왕 가는 길에 인류를 구원하는 일을 하게 하셨다. 인류를 구원하려니까 마귀를 멸하셔야 했고, 마귀가 기대고 있는 율법을 폐해야 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행 3:8) 하는 말씀은 마귀와 귀신뿐 아니라 율법도 폐하신다는 뜻이다. 율법을 폐하는 것이 마귀의 일을 멸하는 것이다. 마귀는 율법이 없으면 활동할 수가 없다. 부엉이는 시력이 대단히 좋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눈이 좋아도 대낮에는 움직이지 못한다. 야행성이라 어두워야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마귀는 율법이 있어야 역사할 수 있다. 마귀는 율법을 틈타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 ‘예수’는 아들의 이름이고 ‘그리스도’는 그의 직분을 말한다. ‘네가 그리스도냐?’ 하고 묻는 것은 ‘하나님이 너를 기름 부어서 보내셨느냐? 네가 직분을 얻었느냐?’ 하는 뜻이다. ‘그가 우리를 구원하는데 직임은 여러 가지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의 피와, 이를 믿고 체험하기 위한 침례 등이 다 ‘직분’이다. 그래서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고”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라고 했다. 성경은 모든 능력을 나타내시는 분이다. 예수께서 병자를 고치실 때 그의 독자적인 권리로 병을 고친 것이 아니다.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있더라”(눅5:17)라고 했다. 앞서 말했듯 ‘함께’라는 말은 ‘성령이 역사한다’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예수가 하시는 일에는 항상 성령이 역사하신다. 예수가 죽는 일도, 예수가 사는 일도, 예수가 환상을 보시는 것도, 예수가 여러 병을 고치는 것도 다 성령이 역사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며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 10:38)
이처럼 성령을 예수에게 부어주시니 그에게서 능력이 나타난다.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라고 했다.
하나님은 말씀만 가지고 천지를 창조하셨다. 그 말씀 가운데 역사하는 이가 누구냐? 성령이시다. 성령을 가리켜 ‘진리의 성령’이라고 한다. 진리를 증거하고 역사하시는 이가 바로 성령이시다. 우리가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성령을 배제하면 능력이 없다. 말씀이 우리에게서 아무 효력이 없다.
하나님의 역사와 직임과 은사, 이 셋 중에 어느 하나도 배제해서는 안 된다. 언제나 같이 가야 한다. 예를 들어 벽에 못을 박는다고 할 때 못이 있어야 하고, 또 이를 눌러주는 힘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뜻이 있고, 그 다음에 그 뜻대로 행하는 아들이 있고, 아들 가운데 역사하는 성령이 있어야 한다. 삼위가 별도로 일할 수 없다.
다만, ‘삼위’할 때 ‘위(位)’라는 말에는 몇 가지 의미가 있는데, 그 가운데 ‘자리’ 혹은 ‘의자’라는 의미가 있다. 그런 이유로 어떤 사람은 삼위를 ‘세 개의 보좌’라고 말한다. 그러면 삼신론자가 되어 버린다. 그런 거짓말을 들으면 우리는 죽는다. 그리스도인은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다(요 17:3). ‘삼위’의 ‘위’는 ‘인격’이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물론 ‘인격’이라고 해서 ‘사람의 격’을 말하는 건 아니다. 인격은 사람이 생기기 전부터 있었던 이미 하나님이 갖고 계신 하나님의 고유한 성품이다. 어떤 사람은 ‘사람은 인격이고, 예수는 신격이다.’라고 말하는데 그렇게 말해서도 안 된다.
‘삼위’는 ‘세 보좌’가 아니다. 예수가 하나님 우편에 앉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우편이 있고 좌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과거 벼슬 중에 ‘우의정’, ‘좌의정’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오른쪽’을 높게 보고 우의정이 더 높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좌의정이 더 높은 벼슬이다. 하나님의 ‘우편’도 왼쪽, 오른쪽 방향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등됨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처럼 ‘삼위’라고 해서 하나님의 보좌, 아들의 보좌, 성령의 보좌가 따로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위’는 인격을 말하는데, 간단히 말하면 ‘지정의’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는 전지하신 분, 곧 지성이 있으시다. 그는 과거도 알고 미래도 아신다. 모세에게는 창조부터 인간의 타락한 과거를 알게 하시고, 선지자에게는 미래를 알게 하셨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통달하시는 분, 곧 다 아시는 분이다.
그 다음은 ‘정’인데, 정이라는 것은 인간의 감정과 같다. 인간은 그 ‘정’을 감정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은 그것을 사랑 혹은 긍휼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정’이 있으신 분이다.
마지막은 의인데, 이는 뜻을 말한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내가 온 것은 내 뜻을 향하려 함이 아니요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 함이라.”,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아버지께 뜻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뜻이다. 바로 그 뜻을 거역하지 않고 지키는 것을 ‘의(義)’라 한다. 이처럼 아버지는 지정의를 가지고 계신다.
아들에게도 지정의가 있다. 그는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했다. 그들이 광야에서 굶는 것을 보시고 마음에 측은히 여기셨다. 이처럼 아들에게는 정, 감정이 있다. 또 아들에게도 의, 곧 뜻이 있다. 그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고 기도하셨다. 아들에게도 뜻이 있지만 아버지의 뜻 앞에서 포기하셨다.
성령도 지, 정, 의가 있으신 분이다. 성령은 지식의 말씀을 가지고 계시다. 우리를 성령으로 지혜의 말씀을, 능력의 말씀을 안다. 성령만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가 말한 것을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생각나게 하신다. 또한 성령은 ‘정’이 있으시다. 로마서 8장 26절은 “성령이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래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라고 했다. 성령도 이런 감성이 있으시다. 마지막으로 성령도 뜻이 있다.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롬 8:27)라고 했다. 성령을 거역하지 말라는 것도 그 뜻이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각각 독립적인 인격, 곧 지정의를 갖고 있다. 그러나 삼위의 인격이 서로 다투지 않는다. 왜?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자기의 것을 포기하고, 성령도 자기 뜻대로 하지 않으시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삼위 각각이 독립적이면서도 그 뜻이 분산되거나 충돌하지 않는다. 오직 아버지의 뜻대로, 그가 사랑하시는 대로 역사하신다. 그래서 모든 게 하나로 모아지는 것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신은 각각 독립적인 인격을 가지셨지만 하나다. 이게 바로 삼위일체다. 그래서 하나님이 유일한 분이다.
어떤 사람은 아버지께 기도해야 되나, 아들에게 기도해야 되나, 아니면 성령께 해야 되나 헷갈려 한다. 그러다 “성령이여! 도우소서!” 한다. 성경 어디에 그렇게 기도했나? 예수에게 말하면 성령이 도우시게 돼 있다. 하나님은 삼위를 통일되게 하는 이름을 알려주셨다. 그 이름이 바로 예수다. 예수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한다’라는 뜻이 있다. 이는 하나님의 이름이다. 예수는 아버지의 이름이요, 아들의 이름이요 성령의 이름이다. 그래서 마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 배급을 하듯, “아버지는 이거 해주시고, 아들은 이거 해주시고, 성령은 이거 해주세요.” 할 필요가 없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게 아버지께 하는 것이고, 아들에게 하는 것이고, 성령께 하는 것이다. 우리는 삼위일체의 신앙인 예수 이름을 불러야 한다.
하나님같은 신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 우리가 믿는 이는 유일한 분이다. 유일하신 하나님이주신 성령으로 충만하고, 진리로 충만하고, 은혜로 충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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