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언베뢰아특강(41)
성령의 사람
(고전 12:1~12)
2018년 3월 30일 김기동 원로감독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전 12:1~12)
인간은 피조물이다. 그런 자들이 어찌 하나님을 알 수 있겠는가? 인간이 하나님을 스스로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알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기를 알게 하신 방법은 사람의 이치를 통해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방법을 통해서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도이다.
하나님은 자기 방법으로, 즉 말씀과 성령으로 자기를 나타내신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도 않고 하나님을 안다고 한다면, 그는 신비주의자이다. 신비주의란 객관성이 없이, 단지 감정에 의지하여 믿는 것을 말한다. 이는 매우 위험하다. 사람들이 "내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았나이다. 주의 이름으로 능한 일을 행했나이다. 내가 주님을 알고 있습니다." 하고 말할 때, 주님이 뭐라고 했는가? "나는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라야 하나님을 아는 자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야 한다.
옥토가 무엇인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라고 했다(마 13). 우리의 신앙은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데 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신 분임을 아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라고 했다(히 11:3). 그런데 말씀을 모르고 ‘하나님이 계시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하는 사람이 있다. 자기 감정으로, 열심으로, 의지로, 심령으로 그렇다고 믿는다 하면 그게 바로 신비주의다.
에스겔 13장1~3절은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의 예언하는 선지자를 쳐서 예언하되 자기 마음에서 나는대로 예언하는 자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본 것이 없이 자기 심령을 따라 예언하는 우매한 선지자에게 화가 있을찐저 이스라엘아 너희 선지자들은 황무지에 있는 여우같으니라”라고 했다.
성경은 이런 신비주의자들을 마치 황무지의 여우 같다고 했다. 황무지의 여우란 불여우를 말한다. 불여우는 작고 아주 날렵하다.
5절부터 7절은 “너희 선지자들이 성 무너진 곳에 올라 가지도 아니하였으며 이스라엘 족속을 위하여 여호와의 날에 전쟁을 방비하게 하려고 성벽을 수축하지도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고 하는 자들이 허탄한 것과 거짓된 점괘를 보며 사람으로 그 말이 굳게 이루기를 바라게 하거니와 여호와가 보낸 자가 아니라 너희가 말하기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하여도 내가 말한 것이 아닌즉 어찌 허탄한 묵시를 보며 거짓된 점괘를 말한 것이 아니냐”라고 했다.
불여우 같은 자들은 허탄한 묵시를 보며 거짓된 점괘를 말한다고 했다. 신령한 체하고 자기 마음에서 나는 말을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말한다는 거다.
8절부터 10절은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또 말하노라 너희가 허탄한 것을 말하며 거짓된 것을 보았은즉 내가 너희를 치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 선지자들이 허탄한 묵시를 보며 거짓 것을 점쳤으니 내 손이 그들을 쳐서 내 백성의 공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며 이스라엘 족속의 호적에도 기록되지 못하게 하며 이스라엘 땅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리니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이렇게 칠 것은 그들이 내 백성을 유혹하여 평강이 없으나 평강이 있다 함이라 혹이 담을 쌓을 때에 그들이 회칠을 하는도다”라고 했다.
이처럼 성경은 아무 계시 받은 것이 없이 자기 심령을 따라 마음에서 나오는 말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 엄히 경고하고 있다.
씨는 그릇에 담아 선반 위에 두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나 씨를 땅에 심으면 거기서 뿌리가 나고, 싹이 나고, 줄기가 나오고, 가지가 나오고, 잎이 나오고, 꽃이 피고, 마침내 열매를 맺는다. 이렇게 네다섯 단계로 변화한다. 이는 과거 사람들도 보았고, 오늘날 사람들도 보았고, 앞으로 태어날 사람들도 볼 일이다. 계절도 1년을 주기로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반복한다. 그 계절 안에서 만물은 죽기 살기를 반복함으로써 계속된다. 과거 이세벨이 이스라엘에 들여온 신이 ‘바알신’인데, 그도 봄에 씨가 땅에 떨어져 싹이 나고 가을에는 영글었다가 겨울에 없어지기를 반복하듯 부활한다고 해서 ‘부활신’, ‘생식신’이라고도 불린다. 아세라 신은 여신으로서 땅과 같다. 말씀이 없으면 부활의 믿음을 바알과 연결시키려 할 것이다. 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하나님의 계시 없이 부활을 믿는 것은 바알신을 믿는 것과 같다. 엘리야가 850명의 바알 선지자들을 다 없앤 이유는 이스라엘 땅에 하나님 외의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우상을 떠나야 한다. 하나님 외의 다른 신을 두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야 하는데, 예수께서는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고 했다. 진리를 알지 못하면 율법에서 해방될 수 없다. 죄에서 해방될 수가 없다. 사망에서 해방될 수가 없다. 마귀에게서 절대 해방될 수가 없다.
마귀가 하는 일은 율법대로 정죄하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이 없으면 마귀는 할 일이 없다. 사람들이 병과 저주에 시달리는 이유가 뭔가? 귀신은 율법이 있는 곳에서 역사한다. 아무리 안수 받아도 율법에 매여 있는 사람은 병에서 자유 할 수가 없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걸 모른 채 그저 병고침만 받으려고 능력을 구한다.
그림자는 뗄 수 없다. 어떤 아이가 운동장에서 잘 놀다가 갑자기 울면서 뛰어다닌다. 햇빛이 쨍쨍한 어느 날 자기 뒤를 졸졸 쫓아다니는 시커먼 그림자를 보고 놀랜 것이다. 그림자를 떼어내 보려고 뛰어 다니지만 아무리 달려도 이놈을 떼어버릴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율법에 매여 있으면 저주와 사망을 떼어 버릴 수가 없다. 그래서 저주와 사망이 당장 육체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영감이 없으면 이렇게 속는다. 영적인 감각이 있다. 육체의 감각은 다 정욕적인 것이지만 영적인 감각은 그런 게 아니다. 내가 목회할 때 물 위를 걷듯 과감히 행할 수 있는 것은 영감이 있기 때문이다. 육감은 우리 신앙생활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사람은 육체가 있기 때문에 모두가 육감을 갖고 있다. 육감에는 시각, 청각, 촉각, 후각, 미각 같은 게 있다. 첫 언약은 바로 이런 육감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은 첫 언약으로 그들의 육체를 다스리셨다. 그래서 구약성경에는 육체로 인도받은 하나님의 백성들 이야기가 나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 천 년 동안 육체로 하나님 알았다. 그러다 예수께서 오셔서 그것이 끝이 난 것이다.
예수가 오신 이후부터는 하나님을 알되 영적으로 알아야 한다. 초등학교에서는 수를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나누는 기초적인 셈을 배운다. 이를 ‘산수’라고 한다. 그러나 중고등학교에 가서는 수를 운영하는 철학을 배운다. 그래서 ‘수학’이라 한다. 산수로는 어떤 기계를 만든다든지 연구하는 일을 할 수 없다. 하지만 수학으로는 그런 것들을 할 수 있다. 육체로 하나님을 아는 것은 산수와 같은 초등학문을 배우는 것과 같다. 우리는 그 단계를 넘어야 한다. 영적으로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영감을 가져야 한다.
사람들이 육감은 충만한데 영감은 없다. 자기 육체는 병든 줄 알고, 저주 받으면 무서워하면서 자기 영혼이 죽어가는 건 모른다. 누군가 목에 칼을 대며 “죽기 싫으면 교회 떠나라! 진리 다 버려라!” 하고 위협하면 진리를 포기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어떤 이유든지 진리를 포기하면 그 영혼은 끝난다.
순교자들은 참으로 영적인 자들이다. 그들은 육체의 오감을 통해 하나님을 알던 첫 언약에서 벗어나 그리스도를 아는 새 언약의 시대를 맞이한 자들이다. 그들은 대나무 꼬챙이를 손가락 사이에 넣고 찌르는 등의 고문을 당했다. 얼마나 아팠겠는가? 그러나 그 모진 육체의 고통이 사라질 때까지 그들은 견뎠다. 왜? 육체의 감각보다 더 큰 영감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영원토록 계신 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이상은 없다. 그는 스스로 계신 분이다. 그런 하나님과 함께 ‘말씀’이 계셨다고 했다. 그 말씀, 곧 아들은 하나님을 가리켜 ‘아브’, 곧 ‘아버지’라 했다. ‘아브’는 히브리 말로 ‘크다’라는 의미다. 이는 아버지가 마지막이다, 곧 그분 이상은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고, 또 자기 위에 그런 아버지가 계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다”(요 14:28)라고 했다.
그런데 그는 또 “아버지는 나와 하나이시다”(요 10:30)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과 함께 말씀이 계시니라’라고 할 때 ‘함께’ 한다는 건 따로 떨어져 있는 각각에 아교를 붙여 하나로 만들듯 하나로 연결한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연합시키는 일을 하시는 분이 성령이다. 그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고, 우리 몸에 있어도 우리가 알지 못한다. 그런 분이 우리 안에 오셔서 무얼 하실까? 바로 ‘함께’ 하게 하는 일을 하신다. 그는 하나님의 영으로서 하나님에게서 나오시는 분이다. 성령이 없으면 하나님과 말씀이 다 따로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기를 보여주셨다. 알게 하신 것이다. 그 방법으로 첫 언약인 율법이 있다. 율법을 누가 가져왔는가? 천사가 가져왔다. 갈라디아서 3장 19절은 “율법이 뭐냐 천사들의 손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인데 예수가 오실 때까지만 일하게 하신 것이니라”라고 했다. 그때 천사는 ‘여호와’라고 하는 하나님의 표호를 가지고 왔다. 하나님은 첫 언약을 천사를 통해 알게 하셨는데, 천사들은 이스라엘이라는 육체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나타낼 수 있다. 지구상에 많은 민족이 있지만 오직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나타내신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해 “저희는 내 백성이다.” 하고 선포하셨다. 바로에게도 이 같이 선포하시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셨다. 그리고 그들을 위하여 언약을 주셨다. 그것이 바로 율법이다. 율법은 육체의 예법이다. 영적인 것이 아니다. 율법 아래에서 육체를 구원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사람으로 하여금 영생을 얻게 할 수는 없다. 율법은 영적인 약속이 아니기 때문이다.
새 언약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인자로서 오셨다. 그가 오심을 전파하는 것을 ‘복음’이라고 한다. 성경에는 예수가 비로소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다고 했다(마 4:17). 예수가 오시기 전에는 복음이 없었다. 그가 침례를 받고 나서야 비로소 복음이 전파됐다.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서 복음이 전파된다.
예수는 영혼을 위해 나타나신 이시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께서 혼인잔치에 가셨는데, 그의 모친이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보고 걱정하며 예수에게 말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게 나와 무슨 상관입니까?’라고 대답했다. 육체의 일이 잘되고 못되고는 주님과 상관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나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가 해야 하는 일은 그가 십자가에서 피 흘려 시작해야 되는 일이다. 그러니 아직 그의 때가 이르지 않은 것이다. 포도주를 만드는 것은 그가 할 일이 아니다. 그는 혼인집에 포도주를 만들어 주려고 이 땅에 오신 분이 아니다.
그래도 안타까운 마음에 모친은 잔칫집 종들에게 예수가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복종하라고 했다. 종들은 모친의 말대로 예수에게 가서 “하명하소서.” 하고 엎드렸다. 예수께서는 그 잔치 집의 샘을 포도주가 되게 하지 않으셨다. 종들에게 여섯 개의 돌 항아리에 물을 부으라 하시고 그것을 손님들에게 떠다 주라 하셨다. 종들은 예수의 말씀대로 돌 항아리에 물을 붓고 그것을 손님들에게 떠주었다. 그러자 손님들은 정말 좋은 포도주를 마셨다고 했다.
그런데 이는 주님의 일이 아니다. 주님은 육체를 도우러 오신 분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형제간에 재산 싸움이 일어나서 예수를 찾아왔다. “주님, 내 형에게 일러 제게 재산을 더 주라고 해주세요.” 그때 주님은 “내가 너희 재물을 나누는 사람이냐? 재물을 가지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줄 아느냐? 약대가 바늘귀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려우니라.” 하고 무시하셨다.
육체의 예법은 첫 언약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만 보여주셨다. 이처럼 하나님은 처음에 율법으로 이스라엘에게만 자신을 나타내셨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의 그림자였고, 하나님은 새 언약으로 자기를 나타내셨다. 어떻게? 복음으로. 복음이 뭔가? 마가복음 1장 1절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라고 했다. 복음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이다. 드디어 하나님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누구를 통해서? 아들을 통해서. 그 아들의 이름이 뭐냐? 예수다. ‘예수’란 이름이 나타난 이후부터 ‘여호와’라는 이름을 전혀 쓰지 않는다. 복음은 영혼을 위한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복음을 전하시는데 비사로만 말씀하셨다. 비사란 비유를 뜻한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께 “왜 우리에게는 천국비밀을 말씀하지 않으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아직 너희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지금은 내가 말해도 너희가 그것을 감당할 수가 없다. 성령이 오셔야 비로소 너희가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비유로만 말씀하신 것이다. 율법은 그림자다. 전체가 하나의 비유다. 예수께서는 바로 그 첫 언약을 비사, 곧 비유로 말씀하셨다.
첫 언약의 말씀이 새 언약으로, 그리고 그것이 신약교회에 소개되는데 이를 진리라고 한다. 율법과 복음과 진리는 다르다. 우리는 이를 분별해야 된다. 성령이 하시는 말씀은 복음이 아니라 진리다. 그래서 성령을 가리켜 진리의 영이라고 한다. 진리는 성령이 자의로 생산하는 말씀이 아니다. 예수가 하신 말씀을 들은 대로 전하고, 예수가 사람들에게 보여주신 영광을 그대로 전하는 말씀이다(요 16:13~14). 성령은 진리의 영이다. 진리는 성령을 통해 전해진다.
성령을 ‘보혜사’라고 하는데, 이는 성령의 직분을 말한다. 보혜사란 ‘증거하는 자, 변호하는 자, 위로하는 자’라는 뜻이 있다. 우리 영혼을 직접적으로 역사하시고 지켜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인 것이다. 예수는 사람의 영혼을 위해 오신 분이라면, 성령은 믿는 자의 영혼, 곧 교회를 직접적으로 다스리시고 이끄시는 분이다. 예수는 세상에 오셨다. 세상에는 믿는 사람뿐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성령은 세상에 오신 분이 아니라 교회에 오신 분이다. 그는 그림자도 아니고, 비사도 아니다. 그림자와 성령의 중간 역할을 하는 것이 예수의 비사, 곧 복음이다. 교회를 위해 성령으로 나오는 것은 생명 양식이다. 이를 ‘영생’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그의 명령은 다 영생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실상을 안 자들이다. 실상이란 실제 체험을 말한다. 율법은 이미 과거의 것이 되었다. 예수도 이 땅에 왔다가 가셨다. 지금은 누가 계시는가? 성령이 우리 안에 임하여 일하신다.
그런데 성령을 무시하면 어떻게 될까? 끝이다. 율법 아래 있던 자라도 예수가 오실 때 기회가 있었다. 또 예수를 핍박하고 욕한 자라도 예수가 부활하심으로써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가 우리 속에 들어와야 하는 오늘날 성령을 훼방한다면 금세도 내세도 기회가 없다. 성령을 거역하거나, 성령을 소멸하거나, 성령을 근심케 하면 금세도 내세도 사함 받을 수 없다. 끝이다.
다시 한번 정리하자면, 하나님은 사람으로 하여금 첫 언약을 통해서도 그를 알게 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게 하는 엄한 율법이 있다. 율법도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의다. 율법의 의가 있으면 복을 받고 구원 얻는다. 그러나 이제 율법이 지나가고 예수가 오셨다. 예수께서는 “나는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향하려 왔노라.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가 하나님의 뜻이요, 곧 아버지의 의(義)다. 바로 이 의가 있으면 영혼이 구원에 이른다. 그러나 이제 예수도 하늘로 가셨다.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다. 하나님 우편에 계신 이가 우리와 어떻게 함께할 수 있는가? 성령으로 가능하다. 성령 없이는 예수와 함께 할 수 없다. 하나님과 함께 할 수가 없다. 오직 성령으로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고, 예수가 우리와 함께하실 수 있다.
예수께서는 “내 살을 받아 먹어라. 내 피를 받아 마셔라. 내 피를 마셔야 네게 생명이 있고 내 살을 먹어야 네게 영생이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생명’은 죽은 영이 사는 것을 말하고, ‘영생’은 살아난 영이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살아있어야 물도 마시고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것처럼 죄에서 구원을 얻어 생명이 있어야 영생의 말씀을 받아 먹을 수 있다. 주님은 그 말씀을 성령으로 우리에게 전해주셨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찌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요 12:47~50) 하고 말씀하셨다.
모든 말씀은 하나의 그물과 같다. 그물망이 아무리 넓어도 그것을 한손에 쥘 수 있는 것은 수백 가닥의 끈이 하나로 모아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모든 말씀은 주님의 살과 피를 말하고 있다. 예수의 이름도 주님의 살과 피를 말하고, 예수의 생애도 주님의 살과 피를 말한다.
비록 주님은 하늘로 가셨지만, 우리는 성령으로 예수의 피를 마시고 그의 살을 먹을 수 있다. 이제는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에게 성령으로 예수의 피와 살을 나타낸다.
요한복음 15장 10~15절은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요 15:10~15)”라고 했다. 예수가 우리에게 나타나야 된다.
또 예수께서는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라고 했다.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기를 나타내신 것이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도 하나님을 알았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아니었다. 그러다 예수가 이 땅에 오셔서 그가 직접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써 하나님의 일을 그대로 다 보여주셨다. 예수는 지금 하늘에 계시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에게서 예수를 나타내신다.
고린도전서 12장 1절은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라고 했다. 꼭 알아야 한다는 거다. 2~3절은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라고 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령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에게서 자기를 나타내셨다. 4절부터 보면 성령의 은사와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해서 나오는데, 이것이 다 성령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기를 나타내시는 것이다. 이렇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을 우리로 유익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고전 12:4).
자식에게서는 그 아버지의 유전자가 나타난다. 그렇지 않으면 친 자식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서 예수가 나타나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된 것을 증거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요한일서 5장 6~8절은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라고 했다. 예수의 생애가 바로 ‘물과 피’고 이를 증거하시는 이가 성령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증거를 받아야 한다.
요한일서 5장 9~12절은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찐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라고 했고, 3장 24절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라고 했다. 이렇게 아주 확실하다.
오늘날 많은 신자가 율법 곧 선악을 분별하는 양심을 신앙의 인도자로 삼고 거기에 끌려 다닌다. 그러면 망한다. 우리는 성령으로 선악을 분별하는 양심의 법, 곧 율법을 극복해야 한다. 그래서 오직 은혜만 받으라는 거다. 어떤 사람을 보면 율법쟁이 같다. 우리는 누가 봐도 성령의 사람으로 보여야 한다.
당신은 죽으면 어디로 갈 것인가? 아브라함의 품속에 들어갈 것인가?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사람도 마지막 날 심판받는다. 성령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만이 심판을 받지 않는다. 물론 율법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사람은 죽으면 무저갱을 통해서 지옥에 간다. 이렇게 세 가지 길밖에 없다.
고운 밀가루를 뭉쳐 반죽을 하면 하나의 덩어리가 된다. 아담이 이와 같다. 아담은 인류라고 하는 고운 입자를 하나로 뭉쳐놓은 자다. 그래서 ‘아담’이라는 이름에는 ‘인류’라는 의미도 있고 ‘한 사람’이라는 의미도 있다. 당신은 지금 누구 안에 있는가?
교회는 만드신 분이 성령이다. 그래서 성령 충만한 영감을 가진 자가 목회를 해야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하고, 예배당이 세워지기도 하고, 예수가 하신 일보다 더 큰 일도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성령을 체험했어도 영감이 없으면 목회를 할 수 없다. 누군가 세워놓은 교회를 물려 받아 지키는 일은 할 수 있을진 몰라도, 자기 교회를 개척하고 자기 예배당을 세우는 일은 하지 못한다. 목회는 영감이 필요하다.
우리 교회에 부목사가 수십 명이지만 목회자는 나 하나다. 부목사는 목회자를 조력하는 목사다. 목회자는 자기 아이디어, 자기 철학, 자기 영감을 가지고 교회를 만들어간다. 만일 부목사 가운데 자기 영감으로 하고 싶다면 개척을 하면 된다.
교회는 성령이 운영하신다. ‘성령충만’이란 성령이 자기를 다스리고 지배하고 계시다는 의미다. 성령으로 자기를 견인하게 하는 것이다. 나는 성령이 일하시는 교회를 만들기 위해 인간의 상식으로 일하려 하지 않는다. 우리 교회는 성령이 일하시는 교회여야 한다. 우리 가정은 성령이 인도하셔야 한다. 우리와 우리 자녀들을 성령이 인도하셔야 한다.
율법이 자기를 지배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께서 변형산에 가셨을 때, 그곳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다. 제자들은 예수가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있을 것을 보고 흥분했다. 모세와 엘리야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최고로 사모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우리 주님도 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하고 기뻐하며 “주여, 우리가 초막 셋을 지으리이까?” 하고 말했다. 오늘날 사람들도 자기 속에 초막 셋을 짓고 있다. 엘리야의 초막 하나, 모세의 초막 하나, 예수의 초막 하나. 예수의 영향력은 3분의 1밖에 안 된다. 예수 이름을 부르면서 율법에 시달리고 선지자에게 끌려 다닌다. 이 얼마나 답답한 일인가?
사람들이 원숭이 사냥을 하는 모습을 보면 재미나다. 아구는 좁고 밑으로 갈수록 넓어지는 큰 술병이 있다. 그 병 안에 원숭이가 좋아하는 음식을 넣고 아구에 끈을 매서 나무에 묶어 둔다. 그러면 원숭이가 음식 냄새를 맡고 와서 병 안에 손을 넣는다. 손을 넣고 음식을 한 움큼 쥐고 빼려고 하면 아구에 손이 딱 껴서 나오지 않는다. 그때 사람이 다가간다. 원숭이는 도망가야 할 텐데 음식을 포기하지 못한다. 손을 놓지 않으니 결국 사람에게 잡힌다.
그것처럼 오늘날 사람들이 율법을 쥐고 놓질 않는다. 그러다가 죽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5장 5절은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고 하면 그리스도로부터 버린바 되고 은혜로 끊긴 자로다”라고 했다. 그런데도 원숭이처럼 그게 아쉽고 아까워서 계속 매달려 있을 건가? 우리는 성령으로 자유해야 한다. 진리로 자유해야 한다. 이제부터 누가 봐도 참 성령의 사람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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