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언베뢰아특강(40)
아버지와 아들은 성령으로 함께하신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28:18~20)
본문에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이라는 말이 나온다.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여호와’만 나왔지,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에 대해서는 언급된 적이 없다. 이는 첫 언약과 새 언약의 사명이 다르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에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에 관한 소식, 곧 복음이 나온다. 그러나 구약성경에는 천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대언한 내용이 담겨 있다. ‘여호와’는 하나님의 표호이다. ‘김기동’은 나의 법적인 이름이고, ‘시무언’이 내 표호인 것과 마찬가지다. 구약시대에는 천사들이 하나님의 표호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직접 말씀하신다. 아들이 직접 말씀하시고, 성령이 직접 말씀하신다. 첫 언약에서 하나님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천사로 대언하게 하셨지만, 새 언약에서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직접 말씀하신다.
구약과 신약을 무게로 따진다면 어느 것이 더 무겁겠는가? 신약이 무겁다. 그렇다고 구약을 무시해도 되는 것이 아니다. 구약은 그 임무가 끝났을 뿐이다. 릴레이 경주에서 첫 번째 주자가 자기 몫을 뛰고 두 번째 주자에게 바통을 넘긴다. 그 후에 첫 번째 주자는 더 이상 뛰지 않아도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구약성경, 곧 율법과 선지자는 바통을 가지고 뛰다가 그것을 신약성경, 곧 예수에게 넘겨준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까지다.”라고 말씀하셨다. 요한까지로 첫 언약이 끝나는 것이다.
바통을 넘겨받으신 예수는 요단강에서부터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3년 간을 뛰셨다. 이때부터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함께 역사하신다.
예수는 죽임을 당하고 부활하여 하늘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곳에서 성령을 보내주심으로써 교회를 탄생시키셨다. 교회는 예수의 몸이다. 교회는 예수를 형상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가 하늘로 가심으로써 눈으로는 더 이상 예수를 볼 수 없지만, 교회를 통해서 예수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교회를 운영하시는 이가 성령이시다. 교회는 예수로부터 바통을 받아 성령을 의지하여 달음박질하는 것이다.
인간의 입장에서는 구약성경이 신앙의 뿌리를 제공해주지만, 신약성경, 특히 복음서는 하나님이 직접 오셔서 일하신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복음서 외에도 서신서들이 있는데, 거기에는 성령이 오신 후 사도들이 나가서 일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다. 우리는 지나간 일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신앙생활은 성령으로 해야 한다. 신앙이 과거의 일을 기념하는 데에서 멈춰서는 안 된다. 당신은 과연 지나간 것으로 신앙생활하고 있는가, 아니면 성령으로 하고 있는가?
요한복음 1장 1절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고 했다.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신다고 했다. 그런데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니라”라고 했다. 어떻게 말씀이 하나님이신가? ‘하나님과 함께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함께 있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함께’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프로스(pros)’라고 한다. 그것은 ‘하나됨’을 말한다. 종이를 벽에 붙이려면 풀이 있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말씀과 하나님이 함께 계실 수 있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는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성령의 역사를 언급할 때에는 보통 ‘함께’라는 단어가 따라 나온다. 요한복음 14장 16절에도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라고 했고, 마가복음 16장 20절에도 “주께서 하늘에 올라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제자들이 나가서 역사할 때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라고 했다.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이런 ‘함께’라는 말을 이해도 못하고,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여길 것이다.
하나님과 아들 사이에 어떻게 ‘함께’가 가능할까? 성령으로 함께하는 것이다. 성령은 아버지도 아니고 아들도 아니다. 말씀이 아버지 앞에서 겸손하여 육신이 되었기 때문에 그 말씀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 하나님과 그 아들이 ‘함께’ 계시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는다.
하나님과 함께 계신 말씀이 이 땅에 오셨다가 죽음을 맛보고 마침내 하늘에 오르셨다. 이는 그가 사람을 영원히 떠나시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를 믿는 자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는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한다. 침례 요한이 주는 침례는 성령의 역사가 없기 때문에 성부와 성자가 함께하는 역사가 없다. 그러나 예수 이름으로 행하는 침례에는 성령이 역사하시고, 그로 말미암아 성부와 성자가 함께하신다.
누가 신자인가? 신자에게는 말씀이 임해야 한다. 하나님과 함께 계신 그 말씀이 임해야 한다. 말씀이 어떻게 신자에게 임하는가? 성령으로 임한다. 성령이 신자와 말씀을 함께하게 하신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이유가 뭔가?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로마서 8장 26~2절을 보자. 성령이 우리의 간구를 도우신다고 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6~28)
성령은 우리의 예배도 도우신다. 요한복음 4장 23절을 보자.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요 4:23~24)
성령은 기도도 도우신다. 유다서 20절은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성령으로 기도’하라고 했다. 또 빌립보서 3장 3절은 ‘성령으로 봉사하라’고 했다. 신앙생활의 모든 것을 성령으로 해야 한다.
그런데 성령으로 신앙생활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한다고 했나? 하나님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그 말씀과 함께하는 것이라고 했다. 성령이 없이는 함께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봉사를 하더라도 성령으로 하라는 말은 하나님과 함께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봉사를 하되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뜻이 일치되려면 성령으로 봉사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배도 성령으로 해야만 하나님과 함께할 수 있고, 기도도 성령으로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정을 들으시고 응답하신다.
고린도전서 2장 10~12절을 보자.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2:10~12)
우리가 하나님의 사정, 즉 진리를 어떻게 알까?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깊은 것을 깨달을 수 있을까? 성령으로 안다. 성령만이 하나님의 사정을 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을 의지함으로써 하나님의 깊은 것을 알 수 있다.
말씀이 임마누엘 하기 위해 사람이 되셨다. 사람은 만질 수 있고,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는 존재다. 그런데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신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어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존재가 하나님과 함께한다니?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성령으로 가능한 것이다.
성경 어디를 보든지 성령의 역사에 대해 말할 때 ‘하나님께서 함께’, ‘주께서 함께’ 하는 식으로 ‘함께’라는 단어가 나온다. 이는 성령이 함께 한다는 의미다. 그 일에 성령께서 간섭하신다는 의미다.
신앙생활이 뭔가? 하나님과 뜻을 같이 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과 뜻을 같이 하나? 성령이 함께 하셔야 한다. 성령이 역사하셔야 하나님과 뜻을 같이 할 수 있다. 성령으로 하지 않고는 하나님과 뜻을 같이 할 수가 없다. 하나님은 범죄한 가인에게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네가 죄를 다스려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가인에게는 성령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성령으로 할 수 있다.
교회가 성령으로 하지 않고는 주와 함께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을 전적으로 의지해서 예수와 함께 해야 한다. 예수는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분이니, 예수와 함께 하면 우리의 영은 영원히 산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역사에 성령이 ‘함께’ 역사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제자들이 하늘에 있는 주님과 어떻게 함께 일할 수 있나? 성령으로 한 것이다. 하늘에 계신 주님은 이 땅에 있는 우리를 성령으로 도우시고, 우리에게서 역사하신다.
많은 사람이 능력 받기를 원한다. 그런데 성령은 의지하지 않는다. 기도만 많이 한다. 물론 간구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성경은 ‘너희가 구하여도 얻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라.’라고 했다. 성령으로 기도해야 되는데 정욕으로 기도하니 응답 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말을 듣고도 무시한다. 성령 없으면 영생 얻을 수 없다. 침례는 성령을 받을 수 있는 길을 트는 것이다. 그래서 침례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받는다. 성령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일하시고 말씀과 동일하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말씀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 히브리서 4장 12절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 있어…”라고 했다. 이는 말씀에 의지가 있다는 의미다. 말씀은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고 있다. 말씀은 귀로 듣고 마는 소리가 아니라 뜻이 있다. 말씀은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의 뜻대로’라 함은 ‘하나님의 말씀대로’라는 뜻이다. 말씀에는 뜻이 있다.
그 말씀은 우리에게 사랑과 평안과 용서를 준다. 율법은 우리를 정죄하지만 복음은 우리를 정죄하지 않는다. 내가 말하는 건 복음이다. 모세가 말한 율법이 아니라 예수의 입으로 나온 말씀을 말한다. 복음은 우리를 정죄하지 않는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예수 믿으면서도 끝없이 정죄를 받는다. 사람들에게 정죄 받고, 자기 자신에게 정죄 받는다. 그러면 망한다.
사람들이 어떤 간음한 여인을 현장에서 잡았을 때 그를 예수 앞에 끌고 갔다. 그리고는 예수께 물었다. “모세는 이런 자를 돌로 패 죽이라고 했는데 당신은 어떻게 할 것입니까?” 그러자 주님은 “누구든지 죄 없는 자가 저 여자를 치라.”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에 사람들이 양심의 가책을 받아 돌을 버리고 자리를 떠났다. 그때 예수께서 여인에게 뭐라고 하셨는가? “여자여, 너를 정죄하는 자가 있느냐? 너를 죄로 책잡은 자가 있는지 보라.” “없나이다.” “너를 고소하는 자가 있느냐?” “없나이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너는 평안히 가라.” 이처럼 예수 앞에 와서는 구원을 받는다. 이게 복음이다. 정죄 받으면 그것은 예수 앞에 간 것이 아니다. 모세 앞에 간 것이다. 지금 당신은 예수 앞에 와 있느냐?
내가 끝없이 말하지만, 선악을 분별하는 양심을 가지고 신앙생활 하면 끝없이 정죄를 하게 된다. 그가 종교인으로서는 온전할지 모른다. 그러나 자기 영혼은 구원할 수가 없다. 정죄 받으면 구원받을 수가 없다. 예수 믿는 자는 심판 받지 않는다(요 3:17). 예수 믿는다는 것은 심판 받지 않는다는 것이고, 심판 받지 않는다는 것은 정죄 받지 않는다는 의미다. 반면에 믿지 않는 자는 그로 인해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다.
인생이 태어나서 죽는 것은 누구나 정해진 일이다. 모든 사람이 태어나서 죽는 날까지 달음박질한다. 다만 그 속도가 빠르냐 느리냐, 그 차이다. 누구든지 죽음에 도달한다. 죽음 이후에는 하나님이 없는 사람, 곧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과 하나님을 만난 사람의 길이 달라진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육체의 날이 다하면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고, 그 영은 무저갱으로 들어간다. 무저갱에서 주님이 재림하는 날을 기다리는 것이다. ‘무저갱’이란 빛이 없는 깊은 곳인데, 거기서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에 나와서 유황불로 직접 들어간다(계 20). 다만 육체의 날이 다하지 못한 사람은 이 땅에서 귀신 노릇하다가 날이 다하면 무저갱으로 들어간다. 안 믿는 사람이나 귀신이나 성격이 똑같다. 안 믿는 자가 하는 행동이 다 귀신이 하는 행동이다.
그런가 하면,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이 죽으면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고 영은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간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다는 것이 구원받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런 사람은 심판을 거쳐야 한다.
앞서 말한 하나님을 못 만난 자들은 소위 ‘심판 없이 망할 자들’이다. 로마서2장 12~15절을 보자.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며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롬 2:12~15)
이처럼 율법 없는 사람은 율법 없이 망하는데, 율법을 얻은 사람들도 심판을 받고 망할 수 있다. 그들은 나중에 심판을 받는다. 무엇으로 심판 받는가? 선악을 기준으로 심판을 받는다. 그리고 그 결과에 따라 그 영이 구원받을 수도 있고, 지옥 불에 들어갈 수도 있다. 이처럼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장차 심판 받을 일이 남아있기 때문에 그들은 구원이 보장된 사람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예수 믿는 자는 죽으면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고, 영은 낙원에 들어간다. 낙원에 있다가 주님이 재림하실 때 함께 부활하여 공중에 올라가 주님을 뵙는다. 예수께서는 우리와 임마누엘 하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나셔서 마침내 죽음까지 도달하셨다. 여기까지는 모든 사람이 동일하다. 그런데 그는 다시 살아나셨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리우셨다. 이것이 진리다. 그러므로 예수에게 가입된 자, 곧 침례 받은 자, 예수와 연합한 자 역시 죽으면 그 영이 낙원에 있다가 부활하여 하늘로 올라간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섬기기는 하지만 아직 그로 인해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니다. 그들은 심판을 거쳐야 한다. 그들에게 아브라함의 믿음이 있는지 보는 것이다. 그 심판을 거쳐 구원을 받는다고 해도, 그들의 구원은 하늘의 천사들과 같은 수준이다.
율법 아래 있지만, 아브라함의 믿음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심판을 통과하지 못하고 유황불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계 20:12~15)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아브라함의 신앙과 같지 않은 자를 말한다. ‘아브라함의 신앙을 가진 자’에 대해 성경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그 계명을 따라 순종한 자라고 했고, 그들의 이름을 생명책에 기록해 놓고 그 아들을 사랑함 같이 사랑하신다고 했다(말 3).
가족 중에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이 있는가? 그들이 예수를 믿지 않은 채 죽으면, 그들의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지만, 그 영혼은 귀신으로서 이 사람 저 사람 속에 들어가 있다가 때가 되면 무저갱에 들어가 있어야 한다. 예수가 이 땅에 왔다가 가신 지금, 어떤 사람이 아브라함의 믿음과 동일한 믿음을 가졌다고 해도, 그가 예수와 연합하지 않았다면 그는 여전히 심판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구원을 장담할 수 없다.
예수 믿으라는 것은 예수를 자기 몸에 들어오게 하라는 것이다. 어떻게? 성령으로!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예수를 나타내게 된다. 반면에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예수를 나타낼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는 성령으로만 믿는 자와 함께하시기 때문이다. 믿는 자에게서는 예수가 나타나야 한다. 예수께서는 “나를 사랑하는 자를 곧 아버지께 사랑받을 것이요, 그러면 나는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하고 말씀하셨다(요 15). 그런데 많은 신자가 주님을 나타내는 일에 관심이 없다.
사람은 어느 때 이 세상을 떠날지 모른다. 나는 누가 무슨 소리를 해도 그리스도와 함께 한다. 그래서 기쁘다. 나는 오늘밤일지 내일일지 모를 그날을 항상 준비하고 있다. 왜? 내가 갈 곳은 낙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괜히 이 땅에 미련 두고 낙오자가 될 필요가 없다. 낙원에서 주님을 기다리는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는다. 그 시간은 마치 피곤한 사람이 깜빡 잠들다 깨는 것처럼, 순식간에 다가온다. 그래서 주의 음성을 듣는 자가 일어난다고 했다.
사람들은 아직 자기가 40대, 50대라 몇 십 년 더 살 수 있는 줄로 착각한다. 신앙생활이 뭔가? 사람들은 하나님의 복을 받아서 돈을 많이 벌고, 큰 집으로 이사 가기를 꿈꾼다. 예수께서 가나의 혼인잔치에 가셨을 때, 잔치에 포도주가 부족했다. 그것을 보고 모친은 예수께 이 집에 포도주가 부족하다고 말했다. 이 집을 좀 도와주라는 것이다. 그러자 주님은 “여자여, 그게 나와 무슨 상관입니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습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는 우리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죽으러 이 땅에 오신 분이다. 사람들에게 포도주나 만들어주고, 혼인 집을 즐겁게 하려고 오신 분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피 흘려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하늘에서 내려오는 포도주를 마시게 하려는 분이다. 육체의 일을 형통하게 하려고 오신 분이 아니다.
주님이 사람의 육체에 관한 일도 도우시지만, 사람이 원하는 대로 항상 그런 도움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광야에서 사람들이 배가 고파할 때에도 딱 한번 떡을 만들어주셨다. 그리고 그날에 남은 떡을 다 거두게 하셨다. 왜? 주님은 사람들에게 떡을 만들어 주려고 오신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어떤 사람은 형제와 유산 문제로 다투고 있을 때, 주님을 찾아왔다. 자기에게 더 많은 재산을 얻을 수 있도록 자기 형제를 달래달라 부탁하기 위해서다. 그때도 주님은 “내가 너희의 재산 나누는 자냐? 그건 내 일이 아니다.” 하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예수 믿어서 세상 일을 형통하려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우리는 하늘에 복을 쌓는 자들이다. 다만, 복을 하늘에 쌓아놓은 자는 이 땅에서 하는 일도 잘 될 수 있다. 그러나 예수에게 이 땅의 일을 해달라고 하는 건 되지 않는다. 먼저는 복을 하늘에 있게 해야 한다. 땅에서의 복은 결국 사라진다. 복을 하늘에 있게 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가 하는 일에 주님이 그때 그때 역사하실 것이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주님은 우리 육체의 일을 도우러 오신 분이 아니라, 우리 영혼을 구원하러 오신 분이라는 것이다.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사람이 죽는 것은 정해진 일이다. 태어났으면 반드시 죽어야 한다. 그런데 언제 죽을지 모른다. 오늘 밤일지 내일 아침일지 모른다. 죽고 나서 후회해 봐야 아무 소용없다. 하늘에 쌓아둔 복이 없으면 그 자손들에게도 복이 없다. 성경은 ‘너와 네 자손이 복을 받으리라.’라고 했다. 자손을 복받게 하려면 자기가 생전에 복을 쌓아놓아야 한다.
당신이 나중에 낙원에 간다 할지라도, 당신의 가족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죽어서 귀신 될 사람도 있지 않은가? 어떤 사람은 예수 믿는다고 시어머니에게 많은 핍박을 받았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시어머니가 갑자기 죽었다. 며느리는 교회를 시원치 않게 다니던 때다. 내가 기도하는 중에 환상을 봤는데 그 며느리가 할머니로 보였다. 며느리에게 벌써 귀신이 씌여 버린 것이다. 이렇게 귀신들은 사람의 몸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가족 중에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항상 양심에 매여 있는 자가 있는가? 그런 자는 항상 정죄를 받는다. 그러면 하늘에 가서도 심판을 받아야 한다.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고는 양심의 정죄를 피할 수 없다. 심판 받지 않으려면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만 죄와 사망의 법을 이길 수 있다.
우리는 다 죽는다. 하지만 그 날과 시는 아버지만 아신다. 그런데 계속 세상에 미련을 두고 살 것인가? 우리는 완전히 예수에게 가서 예수와 같아야 한다. 그러려면 성령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과 함께하고, 말씀과 함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생을 얻는 것이다.
요한복음 7장 38~39절은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라고 했다. 우리는 성령을 받고 성령에 의해 움직여야 한다.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부활하시는 것을 봤지만, 성령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주님은 ‘성령을 받아 내 증인이 되라.’ 하고 말씀하셨다. 성령 충만하자. 살기 위해서 성령 충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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