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언베뢰아특강(39)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역사
(요 1:1~12)
일시 : 2018년 3월 16일
강의 : 김기동 감독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1:1~12)
하나님은 영원전부터 홀로 계신 분이다. 말씀은 그 크신 하나님과 영원전부터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이 사람이 되어 세상에 나타나셨으니,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데, 그는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지만, 우리는 사람이 되신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보고 듣고 만지고 알 수 있게 되었다.
말씀은 사람이 볼 수 있고, 하나님은 볼 수 없는데, 어떻게 말씀과 하나님이 함께 계실 수 있었을까? 이를 성령이 가능하게 하신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과 어찌 함께할 수 있을까? 오직 성령으로만 가능하다. 성령충만하자!
하나님은 높은 분이다
창세기 1장 1절에서 언급하는 '태초'는 만물이 시작된 태초를 말한다. 그러나 요한복음 1장 1절의 태초는 그와 달리 만물이 존재하기 이전, 즉 영원전을 말한다.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는 만물이 시작된 태초이므로, 창세기 1장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한 말씀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출생하신 날이 없는 분이다. 그분은 영원전부터 계시는 분이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남달랐다. 그는 하나님이 다른 신들과는 달리 영원전부터 존재하는 분임을 알았다. 아브라함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오다가 멜기세덱을 만나 그에게 십일조를 드렸는데, 그는 멜기세덱이 제사장이라는 사실은 알았어도 그의 신분에 대해서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사람은 누군가를 사귈 때에 그의 신상을 물어본다. "어디 사세요?" "충청도 삽니다." "그래요? 저도 충청도 출신인데." "와, 동향이네요. 하하하!" "그런데 연세는 어떻게 되세요? 저보다는 연세가 많은 것 같은데." 이런 식으로. 그런데 아브라함은 위험한 전쟁을 통해 얻은 것을 주면서도 멜기세덱에 대한 자세한 신상을 묻지 않았다. 이는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을 하나님처럼 여겼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히브리서 7장 3절은 멜기세덱에 대해서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라고 했다.
요즘 사람들은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면서도 "이 돈을 목사가 다 쓰는 것 아니냐?" 하는 의심을 품기도 하는데, 이는 멜기세덱이 누군지도 잘 모르면서 그를 하나님과 방불한 자로 보고 그에게 십일조를 드리고, 그로부터 축복을 받은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이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복은 누가 비는가? 높은 자가 낮은 자를 위해 비는 것이다. 요즘에는 젊은이들도 노인에게 "복 많이 받으세요." 하고 말하는데, 이는 바른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만수무강하세요." 하고 말하는 것이 낫다. 복은 위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으로부터 축복을 받았다. 이는 멜기세덱이 얼마나 높은 자인지를 말해준다. 하나님은 그와 같이 높은 분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과 동등하다
예수께서도 하나님을 높이셨다. 그는 하나님을 가리켜 “아버지는 나보다 크시다.” 하고 강조하셨다. ‘아버지’라는 말 자체가 지극히 높이신 분이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예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점 때문에 그를 하나님으로부터 유전자를 물려 받은 분 혹은 하나님보다 작은 분으로 알면 오해다. 예수는 본래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하신 분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을 높이며 그를 ‘아버지’라고 부르신 것은 그가 아버지 앞에서 겸억하여 자기를 낮추신 것이다(빌 2:6~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는 말씀을 잘 이해해야 한다. 말씀은 시작한 날이 없다. 출생한 날이 없다. 말씀을 지으신 분이 없다. 사람에게 있어서 아버지가 있다는 말은 조상이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가 하나님을 가리켜 ‘아버지’라고 하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말씀은 본래 하나님과 함께 영원전부터 계셨다. 그가 자기를 낮추신 것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는데, 영원전에는 그런 개념이 무의미했다. 하나님을 가리켜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심으로써 처음 발생한 일이었다. 첫 언약 안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한 사람이 없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함으로써 시작된 일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본래 아버지와 동등하다. 하나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내가 아버지와 동등됨을 취하는 것이 합당치 않다. 내가 자신을 낮추어 아버지의 명령에 복종하는 자가 되겠다.” 하고 겸억하신 것이다. 그래서 그를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유전자를 물려받았다는 말이 아니다. 만일 그런 식으로 이해하면 예수는 스스로 있는 자가 아닌 것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 그는 말씀으로서 영원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 스스로 계신 분, 홀로 계신 분이다.
하나님을 가리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하니까, 하늘이 있어야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오해다. 하늘이 없어도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다. 하늘은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어떻게 하늘을 지어?”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다. 그에게는 아쉬울 것이 없다.
하나님의 이름이 알려진 것은 아들을 통해서이다. 하나님이 홀로 계실 때에는 그를 불러줄 존재가 없기 때문에 이름이 필요치 않다. 그런데 아들이 나타남으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이 알려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로 인해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예수라는 것을 알았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사람들이 하나님을 부를 때에는 예수라는 이름을 부르지 않고, 여호와라는 이름을 불렀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천사를 통해 알려진 하나님의 이름이다. 예수가 나타나시기 전에 사람들을 하나님을 본다고 하면서 본 것은 천사밖에 없었다. 예수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대로, 예수께서 처음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주신 것이다(요 14:9). 그래서 요한복음 1장 18절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라고 했다.
아브라함을 비롯하여 구약시대 사람들이 하나님을 본 것은 천사를 본 것이다. 서울에는 여러 나라의 대사들이 파견되어 있다. 대사는 한 나라의 정부를 대표하여 서울에 와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미국 대사는 미국 정부를 대표하여 우리나라와 교류하는 모든 일을 책임진다. 대사들은 자신들이 결정해야 하는 일이 중대하면 본국으로 돌아가 보고하고 다시 돌아와 일을 진행하기도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천사들 중에서도 대사의 역할을 하는 천사가 있었다.
그 천사가 모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그리고는 또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라고 했다. 여호와라는 표호는 아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시기 전에 천사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이름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 ‘예수’라는 아버지의 이름을 들었다. 그 이름에 대해서 빌립보서 2장 9절은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고 했고, 히브리서 1장 4~5절은 “ 저가 천사보다 얼마큼 뛰어남은 저희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뇨”라고 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아버지보다 서열이 아래구나.’ 하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은 아버지와 동등하신 분을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일찍이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다. 그 아들이 나타났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아버지란 높은 분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예수가 바로 그 높은 분과 동등하신 분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0장 30절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라고 했다.
말씀이 하나님을 보여주셨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를 본 자가 없다. 그를 본 자가 없다고 그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태중의 아이가 엄마를 볼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존재하신다. 영원전부터 존재하신다.
하나님과 영원전부터 함께 계신 말씀이 사람이 되어 나타나셨다. 말씀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와 사람이 되신 후에는 그를 아들이라고 한다. 말씀이 아들이 되신 것이다. 말씀은 아들로서 나타나시기 전에 하나님과 하나였다. 그런데 그가 형상으로서 우리 앞에 나타나셨다. 고린도후서 4장 4절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말씀이 곧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인 것이다. 다시 말해, 말씀이 없으면 아무도 하나님을 볼 수가 없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몰랐다. 그는 다만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다.” 하고 믿었다. 그는 본래 갈대아 우르에 살았다. 당시 그 지역은 문명이 발달한 지역이었다. 거기에는 우상이 가득했다. 이는 그 지역 사람들의 철학이 발달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들은 사람마다 다른 철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한 가지 우상을 공유하지 못하고, 사람마다 서로 다른 우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하나님께 접근하지 못하는 이유는 에스겔 14장 3절 이하에도 말씀한 바와 같이 사람마다 자기 마음에 우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처럼 우상을 갖는다면, 인류가 천만 명일 경우에는 우상이 천만 명인 셈이다.
어떤 기록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아버지는 우상을 만들어 파는 일을 했다고 한다. 어느 날 아버지가 며칠간 집을 비우면서 아브라함에게 집을 맡겼다. 아브라함은 아버지가 만들어 놓은 우상을 모두 파괴해버렸다. 아버지가 돌아와 넘어지고 잘려진 우상의 모습을 보았다. “누가 그랬느냐?” 그러자 아브라함은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그랬겠지요.”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이 녀석아, 이것들이 생명이나 있느냐? 어떻게 이것들끼리 싸운단 말이냐?” 그러자 아브라함이 대답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왜 그런 걸 만들고 계세요?”
아브라함은 우상이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없다고 여겼다. 그가 생각하는 갈대아 우르의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랐다. 그는 첫째, 하나님을 실제로 존재하시는 분, 즉 살아계신 분이라고 믿었다. 둘째, 하나님을 전지전능하신 분이라고 믿었다. 셋째, 하나님을 우리의 사정을 모두 들으시는 분, 긍휼이 풍성하신 분으로 믿었다. 넷째, 하나님은 주인이라고 믿었다. 다시 말해, 자신은 그 분으로부터 계시를 받아야 한다고 믿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는다”(갈 3:9) 라고 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아들이 동일하게 가졌고, 이삭이 가진 믿음을 야곱이 동일하게 가졌다. 그리고 그 믿음을 수백 년 후에는 모세가 가졌고, 그 믿음을 이스라엘이 가졌고, 아브라함 이후 2천 년이 흐른 후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는데, 그가 곧 아브라함이 믿었던 그런 분이었고,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은 바로 그와 동일한 믿음을 가졌다.
다시 한번 복습하자. 아브라함은 친척들이 믿는 철학적 우상을 믿은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분을 믿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이 전지전능한 분이라고 믿었다. 만물을 지으시고 그것들에게 생명을 주시고, 뭐든지 하실 수 있는 분이다. 그는 모든 일을 아신다. 과거의 일도 미래의 일도 뭐든지 아신다. 그리고 그는 우리의 사정을 들으신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 그에게 긍휼이 없다면 우리가 기도를 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고, 아무리 복을 달라고 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주인이시다. 그가 주인이라면 그가 시키는 일에 대해서 복종할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시키신 일에 대하여 “아니오!” 하고 말한 적이 없다. 하나님은 주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계시를 주실 수 있다. 명령을 내릴 수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야, 그를 우리의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불순종하는 이유는 계시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상식과 지식, 그리고 감정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판단하기 때문이다. “내가 왜 땀 흘려 일해서 교회에 바쳐?” 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거부한다. 우리의 믿음은 이런 것들을 극복하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10장4~5절은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라고 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는 믿음을 가졌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류 가운데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그에게 “네 아비 집을 떠나라! 네 친척들을 떠나라! 네 고향을 떠나라!” 하시니,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떠났다.
아브라함은 히브리 사람이 되었다. ‘히브리’라는 말에는“떠나다. 강을 건너다.”라는 뜻이다.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서 완전히 등졌다. 우리가 침례를 받는 것과 같다. 또 그 말에는 “통과하다.”라는 뜻이 있다. 그는 정처 없는 사람이 되었다. 마을 앞을 계속 지나가는 사람이 되었다. 한 마디로 그는 나그네였다. 그래서 ‘히브리’라는 말에는 ‘나그네’라는 뜻이 있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은 나그네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계시한 대로 따라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인이시다. 생존하시는 하나님이 주인이 되셔서 그가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오는 것이다. 주님도 그런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다. 이스라엘 가운데 그만한 믿음을 본 적이 없다고까지 하셨다. 아브라함에게서는 봤지만, 그 후로는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하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고 있는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고 있는가? 이런 믿음은 아브라함만 가진 것이 아니라, 이삭도 그대로 가졌고, 야곱도 그대로 승계 받았다. 그런 믿음을 수백 년 후에 모세도 승계 받았다.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그 믿음을 승계 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리고2천 년이 지잔 후에는 예수께서 똑 같은 믿음을 보여주시면서, 우리에게도 그것을 가르쳐주셨다. 그리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아브라함과 동일한 믿음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믿음과 같은 믿음을 가져야 그와 함께 복을 받는다고 했다.
하나님과 말씀이 성령으로 함께하듯, 우리도 성령으로만 하나님과 함께할 수 있다
다시 요한복음 1장 1절로 돌아가자. 태초에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어떻게? 함께! 그러므로 그 말씀이 하나님이시다. ‘함께’라는 말은 헬라어로 ‘프로스’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합친다는 의미와 연결한다는 의미가 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만, 말씀은 보이고 들린다. 그는 형상이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보이는 말씀이 어떻게 함께할 수 있는가? 이는 물과 기름이 어울리기 힘든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가능하다. 성령으로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성령이 빠지면 이는 불가능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하나님과 어떻게 함께할 수 있는가? 성령으로! 그렇다. 이는 성령으로만 가능하다.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려면 성령으로 말미암아야 한다.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이것이 어떻게 이뤄지는가? 성령으로 이뤄지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을 받으라는 것이다. 구약시대 사람들은 율법 아래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하지 못했다. 성령이 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라고 하셨고,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라고 하셨으며,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고 하셨다.
하나님과 말씀이 함께 계신 것이 성령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잘 기억하라. 우리도 성령으로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지금도 엘리야의 영감을 갑절로 달라고 기도하는데, 우리는 그렇게 기도할 필요가 없다. 변화산에서 모세도 엘리야도 지워지고 예수만 남았다. 그가 하늘로 가시면서 “성령을 기다려라!” 하셨고,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라!” 하셨고, “성령을 받기 전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아라!” 하셨다. 그가 얼마나 성령을 강조하셨는지 기억하라.
신약시대에는 오직 성령이 교회를 세우고, 감독자를 세우고, 성령의 능력과 은사로써 역사하신다. 교회의 감독자도 성령이 세우신 것이다. 어떤 이들은 ‘감독’이라는 말이 성경에 없다고 주장하면서 다수결에 의해 교회를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성경에는 분명히 ‘감독’이라는 말씀이 있다(행 20:28). 감독자를 일컫는 단어로는 그 외에 목자와 장로가 있다. 오히려 목사라는 단어 자체는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우리는 성령을 받아야 한다. 장로교와 감리교와 침례교가 좋은 점도 많으나 결정적으로 성령의 역사를 배제하고 있다. 우리는 성령의 역사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성령을 의지해야 한다. 성령충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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