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언베뢰아특강(38)
말씀이 하나님이시다
(히 1:1~4)
일시 : 2018년 3월 9일
강의 : 김기동 감독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저가 천사보다 얼만큼 뛰어남은 저희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히1:1~4)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이렇게 우리를 불러 주셔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늘에 감추인 것을, 그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또 우리의 귀를 여시고, 마음을 열어 주시고, 우리 모두가 다 은혜를 받고 하나님을 정말 알고 섬기는 자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요한복음 1장 1절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고 했다. 여기에서 ‘태초’라는 말은 창세가 아니라, 창세 이전을 말하는 것이다.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는 만물이 태초이지만, 요한복음 1장 1절의 태초는 영원전을 말한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도 하나님에 대해 얘기한다. “하나님께서 비를 주셔야 된다. 그건 하나님만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그들은 막연하게 전능하신 분으로서의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가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고, 다만 희미하게 보는 것이다. 그렇게 아는 것은 자연의 일부분이다. 그러나 우리는 확실하게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존재하신다. 그러나 아무도 볼 수 없다. 구약성경을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 본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권위로 나타난 천사를 본 것이지 하나님을 본 것이 아니다. 요한복음 1장 18절은 하나님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다. 우주 안을 먼저 생각하면 불 속에도, 물 속에도 계시다.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은 없다. 우주 밖 영계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은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에 의해 그것들이 존재하고, 하나님에 의해 그것들이 활동한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으면 하늘도 존재하지 않고, 만물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한 마디로, 하나님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말씀이 그 하나님과 함께 계시기 때문에 곧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볼 수 없는 분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보았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하나님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니다.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에 신앙을 갖게 된 것이다. 빌립이 말하기를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요 14:8)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 14:9~10)”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 때문이다. 그가 곧 말씀이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태초부터 함께 계시므로 그가 곧 하나님이시다.
이제부터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신 말씀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데 있어서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 무소부재하시고, 만유가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이 되시고,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일컫기로 한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아버지는 아무도 볼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볼 수 있고, 알 수 있고, 체험할 수 있다."
아버지는 크신 분이다. 아버지는 바위 속에도 계시고, 물속에도 계신다. 아버지는 계시지 않은 곳이 없다. 그런데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말씀이 아버지와 함게 계시니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다. 바로 그 말씀을 통해 비로소 사람이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신자들은 그 말씀을 하나님이라 하는 것이다. 말을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하나님이라 하는 것이다. 그 말씀에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능력, 모든 것이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을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라는 구절을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아버지와 함께 있으므로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다” 이렇게 이해하면, 좀 더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신 것은 말씀을 통해서, 다시 말하면 아들을 통해서 하신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아버지와 함께 계신 말씀을 믿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씀'을 '말'로 이해하면 안 된다. 성경에는 많은 말들이 나오는데, 그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 말씀이란 피 뿌린 옷을 입고 있는 말씀을 말하는데, 그는 곧 하나님이시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은 아버지의 뜻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내가 세상에 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 함이라” 하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해서 자기 뜻을 세상에 나타내주시고, 보여주시고, 그 뜻대로 역사하신 것이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도 믿어야 하고, 아들도 믿어야 하나?" 하고 혼란스러워한다. 그런데 아버지는 우리가 볼 수 없는 분이다. 분명히 존재하는데도 우리가 볼 수 없다. 마치 태중에 있는 아이가 엄마를 볼 수 없는 것처럼. 그러나 아이가 엄마의 존재를 부정할 순 없다. 아버지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아버지의 존재를 믿는다. 그러나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믿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는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눈에 볼 수 있게 나타나셨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뜻하신 것이다. 우리 신앙은 보지 못한 분을 막연하게 억지로 믿는 것이 아니다. 만일 보지 못한 분을 믿는다면 열이면 열 모두 자기 멋대로 하나님을 상상할 것이기 때문에 혼란이 올 것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사람마다 다른 것이 아니다. 김씨가 믿는 하나님이나, 박씨가 믿는 하나님이나, 똑같아야 한다. 하나님이 "이렇게 믿어야 한다." 하고 말씀을 보내주셨기 때문이다.
말씀이 임마누엘 하셔서 처녀의 몸에서 나시고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다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신 것, 이것은 김씨나 박씨나 똑같이 본 바이다. 그러므로 김씨의 믿음이나 박씨의 믿음이나 똑같고, 그 믿음은 사도들의 믿음과 똑같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사도들이 본 것을 믿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를 본 사도들의 이야기를 그대로 믿어야 한다. 그래서 마가복음 16장 14절에는 “예수 부활하신 것을 본 자들이 말을 믿지 않음으로 인하여 분히 여기시더라”라고 했다.
우리는 지금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는 광경을 볼 수 없다. 그러나 그 모습은2천 년 전에 사도들이 보았다. 우리는 그들이 본 그것을 믿는 것이다. 그들이 증거한 그것을 믿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이 그들과 같아야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의 믿음이 사도들과 다르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불신자도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전능한 존재를 떠올린다. 우리도 '아버지'에 대해서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우리는 아버지와 함께 있는 말씀을 보고 들었기에 그를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 것은 말씀이 세상에 임하신 이후 비로소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말씀을 하나님이라고 좀처럼 믿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혼란을 겪고 있는 것이다.
누가 우리에게 "당신의 하나님이 누구시냐?" 하고 묻는다면,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 즉 "예수요!"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 사람은 "그게 무슨 하나님이여? 사람이지.” 그럴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끝까지 증거할 줄 알아야 한다.
예수라는 이름은 본래 아버지의 이름이다. 그 이름에는 뜻이 있다.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신다.” 그래서 예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다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다. 약속된 것이다. 여러분이 예수를 안 믿을 때에는 "그런 일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다." 하고 추상적으로 생각했지만, 이제부터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계신 말씀이 하나님이시라고 믿어야 한다. 이것이 구원 얻는 믿음이요, 이것이 복음의 시작이다. 그래서 요한복음17장 3절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했다.
말씀이 아버지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아니다. 또한 성령이 아버지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성령이지, 그렇지 않으면 귀신인지 무슨 영인지 모른다. 과연 당신이 받은 영은 어디에서 왔는가? 성령은 하나님에게서 나오시는 분이다. 요한복음 15장 26절은 “내가 어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라고 했다. 강물이 계속 흐르듯 지금도 계속 나오고 계시는 분이다.
우리는 이제 분명히 알아야 한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게 된 것은 아버지와 함께 계신 말씀 때문이다.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그 하나님을 보고 알고 믿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말씀 이상은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 그 이상을 본 체하면 그는 적그리스도이다. 우리는 오직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처음 알았고, 오직 말씀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말씀이 임마누엘 하여 인자로서 태어나셨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다시 하나님 우편에 올라가셨다. 하나님 우편에 계시다는 것은 하나님과 동등하시다는 의미이다. 예수는 아버지와 동등하신 분이다.
그러나 말씀은 겸억하셔서 스스로 자기를 낮추셨다. 아버지와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신 것이다. 그렇게 겸손한 것이 인자의 성품이다. 그는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다” 하고 말씀하셨다. 또 그는 “아버지는 나보다 크신 분이시다” 하고 아버지와 자기를 구분하셨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무도 볼 수 없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봤으니 이제는 아버지를 보고 싶습니다.” 할지라도, 그것은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는 볼 수가 없어다. 우리의 신앙은 오직 말씀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말씀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 말씀이 이 땅에 나타났다. 이에 대해 히브리서 1장 1~4절은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저가 천사보다 얼만큼 뛰어남은 저희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라고 했다.
옛적에는 선지자와 율법이 다양한 비유를 통해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말씀했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은 그를 만유를 상속 받아 다스릴 자로 세우시고, 그를 위하여, 그로 말미암아 만유를 지으셨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비록 인류는 우주가 생긴 후 오랜 시간이 흘러 생겨났지만, 2천 년전에 세상에 오신 예수보다 먼저 있지 않았다. 예수가 오히려 만유보다 먼저 계셨다. 그는 태초에 아버지와 함께 계신 말씀이다. 그가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것이 2천 년 전일 뿐이다.
만물은 아들을 위해 지음 받았다. 우주뿐 아니라, 영계도 포함된다. 예수가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천사가 먼저 활동했다. 천사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거할 수 있는 하늘이라는 공간이 필요한데, 그것을 먼저 만드셨다. 그러나 말씀은 그보다 먼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아버지께서 그 모든 것을 말씀을 위해 창조하신 것이다.
여기서 신앙이 인본주의와 신본주의로 갈라진다. 모든 것이 아들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인정하는 것이 신본주의다. 아들을 위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죽음도 아들을 위한 것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그 열매를 먹지 말라고 했다. 선악을 아는 것은 하나님만의 권리이기 때문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어 우리가 선악을 아는 지식을 취하면 안 된다. 뱀의 유혹이 무엇인가? "먹어도 안 죽는다. 네가 먹는 날에는 눈이 밝아져서 선악을 분별할 줄 하나님이 아시고 먹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죽지 않는다.”라고 했다. 이처럼 마귀도 그 열매를 억으면 사람이 선악을 알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과 마귀의 말이 어떻게 차이가 나는가? 하나님은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고 했고, 마귀는 “안 죽는다.”고 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네가 율법대로 살면, 율법을 깨달으면 죽는다.”라고 말씀하신다. 율법이 있기 전에는 죄가 있는 줄도 모른다고 했다. 율법은 선악을 분별하는 법이다. 그 율법을 알면 죽는 것이다. 마귀는 반면에 죽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나는 최근 설교를 통해 "네 영혼을 양심에 맡기면 너는 죽는다.”라고 강조한 것이다. 반면에 마귀는 “안 죽는다.” 하고 말하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인류가 선악과를 먹고 죽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할 수 없이 와서 대신 죽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을 위해서 죽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람이 죄를 범하지 않아도 죽기로 하고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발생한 일이다. 아들이 아버지 앞에서 겸억하셔서 자기를 낮추려 하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는 어차피 죽을 아들의 죽음이 우리에게 구원이 되게 하신 것이다.
인본주의는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때문에 죽으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신본주의는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죽으셨다." 하고 말한다. 또 인본주의는 인간이 타락한 후에 비로소 하나님 아들이 세상에 올 계획이 세워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신본주의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버지 앞에서 자신을 낮추시기 위해 세상에 오셔서 죽으실 것을 위해 인류가 창조되었다고 말한다.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죽게 된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죽으실 때에 꼭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도 수명이 다해 죽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피 흘리시는 일을 하여 우리를 살리셨다. 그가 죽는 길에서 우리를 살리신 것이다. 우리를 살릴 필요가 없었다면, 피 흘리지 않고 죽었다가 부활하여 하늘에 가실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뜻대로 죽으시고, 그 뜻대로 부활하신 분이시다. 사람들은 자꾸 모든 것을 '인간을 위해서'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모든 것이 '아들을 위해서' 정해진 것이다.
히브리서 1장 3~4절은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저가 천사보다 얼만큼 뛰어남은 저희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을 얻으심이니”라고 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이루신다. 우리가 수명을 연장시키고 싶어도, 우리 뜻대로 목숨을 더 주시는 것이 아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들으심이라 들으시는 줄 안즉 받은 줄로 아느니라” 하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부족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우리가 부족하다고 느끼고 그것을 채우려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주시기로 뜻을 세우셨다. 그래서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뜻만 안다면 기도에 실망할 필요도 없고, 이적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인본주의 신앙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결국 "나 살려주세요. 뭐 해주세요." 하고 하나님께 구걸하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감사하며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인생처럼 어린아이가 되어 성장하시고, 사람 같이 죽으셨다. 그가 바로 하나님이시다. 예수가 죽으신 것은 아버지가 죽으신 것이 아니다. 말씀이 죽은 것이다. 부활도 말씀이 부활하신 것이다. 우리는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은 후에 부활하신 것을 봤기 때문에 그가 십자가에서 죽은 후부터 부활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전부터 부활이다. 그는 말씀이 성령을 통해 여인의 몸에 잉태하여 인자로서 부활하셨고, 죽음을 맛본 후에 또 부활하셨다. 그는 이미 생명이다. 우리는 그 길에서 그에게 합류함으로써 사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침례를 받게 하신 것인데, 침례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다.
우리는 신본주의 신앙을 지켜야 한다. 내가 핍박을 받고 어려운 베뢰아운동을 하는 이유는 신본주의 운동을 하기 위한 것이다. 귀신을 쫓아내는 것도 하나님 뜻이기에 하는 것이고, 침례도 하나님을 뜻을 이루기 위해 하는 것이다. 전부가 말씀대로 하는 것이다. 이것이 베뢰아이다. 말씀대로 체험하고, 말씀대로 순종하고, 말씀대로 나타내야 한다.
"베뢰아? 나도 알아. 베뢰아 사람들처럼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것." 한다고 베뢰아가 아니다. 말씀과 똑같아야 한다. 예수와 똑같아야 한다. 예수께서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요14:12)라고 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 하시던 일을 그대로 할 수 있어야 한다. 왜? 우리는 말씀을 믿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믿음은 "말씀이 하나님이시다!" 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말씀이 왜 하나님이신가? 말씀이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말씀을 위해서, 즉 아들에게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주시려고 모든 것을 지으시고 준비하신 것이다. 앞으로도 세상에는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았던 일들이 나타날 것인데,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것이지, 진보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세상에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어떤 일을 하실지 모른다. 우리는 그것을 믿고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아들을 위해 행하시니, 우리가 그 아들 안에 들어가면 아들과 같은 영광을 받고, 아들과 같은 나라를 소유하고, 아들과 같은 권세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별도로 얻는 것이 아니라, 아들 안에 들어가서 아들의 권세와 나라와 영광을 누리는 것이다. 그래서 로마서 8장 16절은 '그리스도와 함께 후사이면 상속받을 자라면,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 받기 위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도 받아야 한다. 그와 연합해야 된다.'고 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나는 고난 받기 싫어. 이 땅에서 편하게 살고 싶어." 하고 바란다. 이 땅이 마지막인줄 알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땅에서 나그네이다.
우리는 신본주의 신앙을 고수해야 한다. 우리 교회가 다른 교단에게 욕을 먹는 것은 그들의 교리를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을 따르면 우리는 주님의 뜻대로 할 수가 없게 된다. 우리는 주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주님, 돈이 없어서 우리 아이들이 굶습니다. 도와주세요. 왜 안 도와주십니까? 그래도 안 주십니까? 그럼 이혼해요!" 하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 도와주세요. 하지만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해야 한다. 기도의 절정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이다.
말씀이 하나님이신데, 이 땅에 와서 우리에게 자신을 보여주시고, 일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와 연합하게 하려는 것이다. 간단하지 않은가? 말씀이 임마누엘 하셔서, 육신이 되어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늘 우편을 얻으셨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위해 준비하신 모든 것을 아들이 당장 가서 얻지 않으시고, 자기를 낮춰 아버지가 살려 주셔야만 살겠다고 작정하시고, 자기의 목숨마저 인류에게 내어주시고, 아버지가 성령으로 그를 살리시니 비로소 살아 하늘에 오르셔서, 아버지께서 아들을 위해 예비하신 모든 것을 상속받으시고 다스리시는 것이다. 이제 예수는 아버지와 대등하다. 그러나 그는 피조물의 왕이 되셔서 하나님 우편에 계시고, “아버지는 나보다 크시다." 하고 고백하신다. 이 모든 것은 아버지의 뜻대로 이뤄진 일이다.
아버지는 누구인가? 자기 뜻을 100% 이루시는 분이다. 우리가 "주여, 내 뜻대로 이뤄주소서!" 할지라도 이뤄지지 않는다. 아무리 비싼 신발도 발에 맞지 않으면 신을 수가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뜻대로 씌여지지 않으면 하나님은 버리실 수밖에 없다.
포도나무 가지가 열매를 맺지 않으면 절로 말라진다고 했다. 우리는 예수와 연합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신 분은 오직 한 분밖에 없다. 그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으로서, 죽었다가 부활하셔서 하늘에 가셨다. 그 부활하신 말씀을 진리라고 한다. 진리가 나타난 후부터 성령이 역사하는 것이다.
말씀이 하나님인데, 하나님이 오셔서 인생과 동일한 삶을 가지시고, 인생처럼 죽음을 맛보시고, 부활하셔서 하늘에 가셨다. 사람들이 그것을 보았다. 그가 잉태한 것도 봤고, 태어난 것도 봤고, 자라는 것도 봤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도 봤고, 부활하신 것도 봤고, 승천하는 것도 봤다. 우리는 그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는 것이다.
주님은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않음을 분하게 여기셨다(막 16:14). 그리고 말씀하셨다. “믿고 침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막16:16~18) 이제부터 병을 위해서 기도하든, 무엇을 위해서 기도하든,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도 없으면서 병 낫기만을 구하지 말고, 믿음을 갖게 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믿으라니까, 단지 병 낫고 싶은 조바심에 "믿어요. 믿어요." 한다. 그러나 우리는 말씀만이 100% 이뤄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말씀만이 하나님께 100% 영광 돌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거기에 참여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이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고 간구하라. 이것이 간구의 절정이다. 아무리 "꼭 주셔야 합니다." 할지라도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해야 한다. 내가 구한 것을 설령 받지 못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응답하신 것이다.
이 시간에 분명히 기억하라. 말씀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아주 형통하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말씀은 형통하는 분이시다. 그래서 말씀이 역사하는 곳에 성령이 함께 역사하신다. 성령은 말씀이 육신이 될 때에 잉태를 도우시고, 출산을 도우시고, 성장과 이적과 죽음을 도우시고, 부활을 도우시고, 승천을 도우셨다. 지금도 우리가 말씀에 참예하면 성령이 그와 같이 역사하신다. 우리는 신비주의가 아닙니다. 다른 신비한 것을 구하지 말고 믿음을 가져야 한다.
내 영혼아 하나님 말씀을 믿자.
내 영혼아 하나님 말씀을 믿자.
내 영혼아 하나님 말씀을 믿자.
"하나님 말씀을 믿자!"라고 하니까, 사람들이 자꾸 말씀과 하나님을 분리한다. 그런 오해를 막으려면 “내 영혼아, 하나님의 말씀을 믿자.“가 아니라, “내 영혼아, 말씀이 하나님인줄 믿자.”라고 하하는 것 좋다. 말씀이 하나님인 줄을 믿으라는 것이다.
여러분이 말씀을 사모하고 순종하는가? 그러면 하나님과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럴 때에 성령이 역사하신다. 당신에게 성령이 역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당신이 말씀과 연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는 하늘로 가셨다. 그가 하신 일이 진리다. 그것은 변하지 않는다. 진리에 성령이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의 성도가 되어야 한다. 성령이 역사하실 것이다.
예수 부활 이후에, 그 말씀을 가리켜 진리라고 한다. 진리에는 율법이 함께하지 못한다. 진리가 그 말씀이요, 그 말씀은 하나님이다. 그 말씀이 임마누엘 하셨다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여 하늘에 올라가셨다. 이것이 진리이다. 우리는 그대로 그것만 믿으면 된다. 예수의 친척들이 있지만, 친척들 따라다니지 말라. 예수의 모친이 있지만, 모친을 따라다니지 말라. 오직 예수만 따라 다니는 것이다. 오직 그와 연합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요일4:6) 지금 당신 속에 성령이 역사하는가? 진리의 영이 역사하는가? 율법이 있으면 진리의 영이 역사하지 않는다. 예수와 율법이 함께할 수 없다. 율법은 사람이 된 적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이 되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부활하셨고, 하늘에 오르셨다.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은 태초부터 있는 그 말씀을 돕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태초부터 있는 말씀이란 예수를 가리키는 것이다.
당신은 예수를 아는가? 당신은 예수에게 연합했는가? 이것이 핵심이다. 이제부터 "말씀이 하나님이시다." 하고 기억하라. “이 말씀이 곧! 곧! 곧!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다”라고 했다. 이것이 신앙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통성으로 기도하자. 나를 하나님 뜻대로 신앙하게 하옵소서! 신본주의 신앙을 갖게 하옵소서!
녹취록 - 다운로드